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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 - 中庸

하늘이 명령하여 천도를 만물에 부여한 것이 ‘성(性)’이다. 이 천명을 따르는 것이 ‘도(道)’이다. 이 하늘의 도리를 올바르게 닦는 것을 ‘교(敎)’ 라 한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너무나 유명한 『중용(中庸)』의 정언 명령이다.  그렇다면 ‘도(道)’란 무엇인가?
‘도(道)’가 하늘에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명(命)’이라 하고, 만물에 있을 때는 ‘리(理)’라 하며, 사람에게 있을 때는 ‘성(性)’이라 한다.
在天爲命, 在物爲理, 在人爲性
그러므로 ‘천명(天命)’은 선험적인 것이며, ‘솔성(率性)’은 수양론적인 것이 아니고 윤리론적인 것이다. 이는 본성에 근거한 도덕법칙으로서의 도리나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천명’과 ‘솔성’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개선할 수 있는 영역은 오직 ‘수도(修道)’에 있다.
‘수(修)’하지 않아도 되는 ‘도(道)’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세상에 노력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도(道)’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도(道)’는 영원히 ‘수도(修道)’의 대상인 것이다.
‘수도(修道)’를 일러 ‘교(敎)’라고 한다. 현재 우리가 제도권에서 시행하는 교육은 ‘자연’의 영역이 아닌 ‘문화’의 영역이다. 노자는 도를 자연(自然)으로 이루어지는 ‘무위(無爲)’의 영역이요 본성에 따른 ‘존재(存在)’의 영역으로 규정하였지만 우리에게 절실한 현대적 의미의 도는 교육을 통한 ‘유위(有爲)’의 영역이요, 수양이나 수련을 통한 ‘당위(當爲)’의 영역인 것이다.
중용이라 할 때의 ‘중(中)’은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기울지 아니하며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또한 ‘용(庸)’이란 주자(朱子)는 ‘평상(平常)’이라 주석하였으며, 정이(程頤)는 ‘불역(不易)’이라 하였고, 정현(鄭玄)은 ‘용(用)’이라 하였으며, 다산(茶山)은 ‘항상(恒常)’ 이라 하였다.
중용이란 기계적 중립이 아닌 ‘적중(適中)’의 상태를 말한다. 적중이란 ‘시(時)’와 ‘처(處)’에 합당함을 전제한다. 곧 ‘시중(時中)’과 ‘처중(處中)’이 온전히 이루어진 상태가 ‘적중’이다. 그러므로 중용의 핵심은 ‘수시처변(隨時處變)’이라 할 수 있다.
어느 철새 정치인이 자신을 일러 좌도 우도 아닌 ‘극중(極中)’이라 하였다. 극중이란 사전에도 없는 말이다. 자신은 좌파도 우파도 아닌 언제나 중간자적 입장에 서겠다는 말로서 보신주의자적 입장에서 기회주의로 처신하겠다는 속내를 자인하는 언어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종종 언론에서 ‘중도층’이라고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심사가 매우 불쾌하다. 저들이 ‘중도(中道)’의 의미를 진정으로 알고서 저러는 것일까? 좌우 진영 논리를 벗어나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유권자를 말하는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엔 중도라기 보다는 ‘부동층’이나 ‘무당층’이라는 말이 훨씬 더 적합할 듯하다.
중도층이 성립하기 위해선 중도 노선의 정당이나 중도를 지향하는 정치 세력 또는 중도의 아젠다가 전제되어야 한다. 한낱 정치 무관심 내지는 정치 혐오증으로 인하여 지지하는 정당이 없는 상태를 중도층이라 하는 것은 정치적 난센스이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생존의 경쟁을 통한 실천적 삶의 의지를 체험해 보지 못한 ‘관념적 철학’은 언제나 필드에 대한 존경심을 상실하는 우를 범하기 마련이다. 나는 세상의 모든 진리가 ‘중용’에 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한비자는 ‘인성호리(人性好利)’설을 주장하였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라는 말이다. 동물의 세계에 ‘이타적’인 양심이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 또한 나면서부터 이타적인 인간은 아무도 없다. 사람은 모두 ‘이기(利己)’에서 출발하여 ‘지기(知己)’에 이른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은 이 과정을 넘지 못하고 생을 마치는 사람도 있지만 더러는 ‘지기(知己)’를 넘어 ‘극기(克己)’의 단계에 이르는 사람도 있다. 여기서부터는 이타적 인간형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아주 드물게는 ‘극기(克己)’의 단계를 초월하여 마침내 ‘성기(成己)’의 세계에 진입하는 존경할 만한 위인도 있다.
‘심재(心齋)’니, ‘좌망(坐忘)’이니, ‘상아(喪我)’니, ‘현해(懸解)’니 하는 실체가 없는 문학적 상상력에 불과한 수사학적 언어유희를 마치 구원에 이르는 수양의 도구인 양 오해해서는 곤란하다. 장자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정의를 구현하기보다는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영원한 진실’의 문제를 추구한 것이었을 뿐, 사회 공동체의 공화(共和)나 구원의 길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이미 이천 오백년 전에 공자는 ‘노장(老莊)’을 이단으로 규정하며, ‘조수불가여동군(鳥獸不可與同群)’이라 하였다. 사람은 새와 짐승과 더불어 사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회적 존재라는 말이다. 사회의 유기적 기능은 ‘무위(無爲)’를 통해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유위(有爲)’의 인위적 노력의 결과물로서 성장해 가는 것이다. 나는 동서양의 어떤 종교적 사상이나 철학적 사변이든지 간에 ‘빵의 문제’와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 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관념 철학이나 메타포적 상상력으로 빚어낸 레토릭을 단호히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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