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가 곧 심의를 시작할 2024년도 예산안의 최대 관심사는 연구개발(R&D) 예산 삭감 문제다. 내년도 정부 지출은 올해보다 2.8% 늘었는데 연구개발 예산은 16%나 줄어든 26조 원에 그쳤다. 국회가 원안을 그대로 가결하면 33년 만에 처음으로 연구개발 예산이 전년도보다 감소한다. 지난 정부 때 5%를 넘겨 세계 최고 수준을 기록했던 정부 총지출 대비 연구개발 투자 비중은 3.9%로 급락한다. 과학기술인협의회총연합회를 비롯한 관련 단체들은 ‘국가과학기술 바로세우기 과학기술계 연대회의’를 결성해 과학기술계를 카르텔로 매도한 정부의 사과와 연구개발 예산의 원상회복을 요구했다. 「네이처」와 「사이언스」 등 국제학술지와 외국 언론도 놀라움과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신진 연구자와 학생 연구원 대량 해고와 장기 사업 중단 등 예산 삭감이 과학 기술 연구 현장에 몰고 올 충격에 대한 지적과 비판은 앞으로 과학자들이 할 것이다. ‘문과 남자’인 나는 이 문제를 경제학의 관점에서 비평해 보려고 한다. 한국경제는 이미 오래 전에 저성장 국면에 들어섰다. 누가 잘못해서 그리 된 게 아니다. 고도성장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경제이론으로도 그렇고 역사를 보아도 그렇다. 서유럽 선진국과 미국·일본도 산업화 초기에는 성장률이 높았다가 고도 산업사회에 진입한 뒤에는 성장률이 하락했다. 일당독재를 하면서 시장경제를 도입한 베트남과 중국도 마찬가지다. 한국이라고 예외겠는가. 어떤 요인이 국민경제의 성장률을 결정하는가? 단기적으로는 화폐유통량, 정부지출과 순수출을 포함한 사회의 총수요, 경기 전망 등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하지만 길게 보면 노동투입량, 자본투입량, 그리고 생산기술 수준 세 가지다. 하나씩 간단하게 살펴보자. 노동투입량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오래 일하느냐를 나타낸다. 인구가 증가하고 경제활동 참가율이 상승하고 평균 노동시간이 길어질수록 경제성장률은 높아진다. 박정희·전두환의 개발독재 시대 우리나라가 그러했다. 그러나 산업화 덕분에 국민소득이 올라가자 여성의 교육수준과 경제활동 참가율이 높아졌고 출산율이 빠르게 하락했다. 민주화가 이루어지자 사용자가 노동법을 무시할 수 없어져 평균 노동시간이 점차 줄었다. 노동투입량 증가속도가 현저히 둔화한 것이다. 잠재성장률(물가상승 없이 도달할 수 있는 최대치의 경제성장률)은 지속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 자본투입량의 변화는 저축률(투자율)이 좌우한다. 저축률은 한 해 동안 사회가 생산한 것 중에서 소비되지 않은 것을 말한다. 기업이 사내 유보한 영업이익과 민간가계가 소득 가운데 소비로 지출하지 않는 것 등을 모두 포함한다. 정부도 국민연금을 비롯한 ‘강제저축제도’를 운영함으로써 일익을 담당한다. 투자는 기업의 몫이지만 정부도 일정한 역할을 한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만, 저축률이 언제나 투자율과 일치한다는 신고전파 경제학의 틀린 이론을 편의상 받아들이자. 국민경제가 생산한 부가가치 가운데 소비하지 않은 꼭 그만큼 다음 시기에 생산에 투입할 수 있는 자본의 양이 증가한다는 이론이다. 그 이론에 따르면 저축률이 높은 국민경제는 그렇지 않은 국민경제보다 빠르게 자본투입량을 늘려나가며 잠재성장률도 그만큼 높아진다. 한국의 저축률은 예나 지금이나 30%가 넘는다. 산업화 시기에는 기업의 사내 유보가 거의 없어서 총저축은 대부분 민간가계의 몫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최근 민간가계의 저축률은 5-10%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저축도 투자도 대부분 기업의 몫이 되었다. 그런데 자본이 국경을 큰 어려움 없이 넘나드는 세계화 현상으로 인해 저축률과 자본량의 연계성이 약해졌다. 한국 기업들은 임금수준이 낮은 국가와 내수시장이 큰 선진국에 막대한 자본을 투자한다. 저축률이 여전히 높아도 잠재성장률은 하락한다. 생산기술 수준은 시간을 따라 높아지며 그 속도는 국민경제마다 다르다. 무엇이 속도의 차이를 만드는가? 연구개발 투자와 제도적 환경이다. 생산기술은 사람이 구현한다. 재능 있는 사람을 편의상 ‘영재’라고 하자. 영재가 태어날 확률은 생물학적 우연(생식세포와 수정란에서 벌어지는 유전자 재조합)이 결정하기 때문에 모든 호모 사피엔스 집단에서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어떤 국민경제가 생산기술을 빠르게 발전시키려면 그 사회에서 태어나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재능을 발견할 기회를 제공하고 그 재능을 발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재능 있는 사람들이 발견해낸 새로운 과학 정보와 기술을 생산 활동에 적용하도록 북돋우는 보상체계와 제도를 구축해야 한다. 필요할 때는 외부에서 영재를 영입하거나 앞선 기술을 들여와야 한다. 그래서 우리 정부는 지난 30년 동안 연구개발 예산을 계속 늘렸다. IMF 경제위기 때는 더 많이 늘렸다. 기업들은 앞다투어 연구소를 설립했고 당기순이익을 배당하지 않고 기술 개발에 투자했다. 자본이 국경을 마음대로 넘나드는 세계화 시대에 인구가 줄어드는 사회가 경제를 성장시킬 수 있는 방법은 생산기술 향상뿐이기 때문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