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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손수 처단하고 뤼순의 감옥에 갇혔다. 이토는 일본을 대표하는 군국주의자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반도를 집어삼키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조선의 뜻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토의 흉계를 알고 있었으나, 그의 만행을 저지할 방법을 누구도 찾지 못하였다.
그때 우리의 안중근이 나섰다. 의사는 러시아제국의 하얼빈 역에서 생면부지 이토를 용케도 알아차리고는, 침착하고도 정확하게 그의 심장을 쏘았다. 1909년 10월 26일의 일이었다. 참으로 대단한 담력이요, 뛰어난 사격 솜씨였다.
안 의사는 뤼순 감옥에서 하루하루 죽음을 기다리는 몸이 되었다. 그때 그는 자신의 앞에 남아 있는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을 <동양평화론>이란 책자를 저술하는데 바쳤다. 전쟁의 기운이 한창 동아시아를 뒤덮고 있을 때 우리의 안 의사는 평화만이 살길임을 주장한 것이다. 여기서도 확인되듯, 의사가 폭력을 숭배한 나머지 이토를 처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평화를 지키려고 최후의 비상수단을 쓴 것이었다.
<동양평화론>은 ‘서문(序文)’과 ‘전감(前鑑, 지나간 역사를 살핌)’, ‘현상(現狀, 현재 상황의 분석)’, ‘복선(伏線, 불투명한 미래)’ 및 ‘문답(問答, 질의응답)’의 순서로 서술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안 의사에게 집필에 요구되는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고, 서둘러 사형을 집행해 버렸다(1910년 3월 26일). 그때까지 안 의사는 ‘서문’과 ‘전감’의 집필을 겨우 마쳤다. 목표로 삼았던 원고의 5분의 2를 끝낸 셈이었다.
한발 한발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을 때 뉘라서 평정한 마음으로 이처럼 묵직한 책을 저술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우리 안 의사는 전문적인 학자도 아니고, 이른바 문필가와는 기질적으로 다른 행동의 인물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의사의 유고(遺稿)를 한쪽이라도 읽어본다면, 우리의 예단이 섣부른 것이었음을 깨닫고 옷깃을 바로잡을 것이다. 유고의 첫 줄부터 마지막 줄까지 안 의사는 침착하고 논리 정연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쳤으니, 한 구절도 막히거나 걸림이 없었다.
‘서문’에서는 19세기 말에 온 세상이 제국주의에 감염된 나머지 약육강식의 이데올로기를 진리로 오판해 인간의 삶을 망가뜨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서구열강의 침략행위와 마찬가지로 일본이 총칼을 앞세워 이웃 나라를 식민지로 삼으려는 시도 역시 근본적으로 틀려먹었다고, 안 의사는 냉철하게 비판하였다.
이어서 전개되는 ‘전감’에서 안 의사는 당대의 역사를 다섯 가지 측면에서 깊이 파헤쳤다. 첫째, 청일전쟁이 침략전쟁이란 점을 밝혔다. 둘째, 러시아가 추구한 극동 정책이나 일본의 한반도 정책이 침략을 목적으로 삼았다는 점을 비판하였다. 셋째, 안 의사는 러일전쟁의 원인을 분석하고, 서구열강이 이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은 한국인의 관점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넷째, 러일전쟁을 마무리하는 강화조약이 왜, 하필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체결되었는지를 따져 물었다. 끝으로, 안 의사는 일제의 대륙 침략이 동양의 평화에 근본적인 장애 요인이라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한마디로, 안 의사는 19세기 후반부터 국내외의 정세가 얼마나 긴박하게 요동쳤는지를 통찰하고, 한-중-일 세 나라의 평화를 지키자고 힘껏 주장하였다.
안중근 의사가 <동양평화론>의 저술을 마치지 못하고 형장의 이슬이 되고 만 것은 실로 원통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다행스러운 일도 있었다. 최후의 순간을 앞두고 안 의사는, 동양평화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장차 다음의 네 가지 사항에 유념하라는 글을 남겼다.
첫째, 자신이 갇혀 있는 뤼순 땅을 영세중립지대로 선포하고, 그곳에 한-중-일 세 나라의 분쟁을 방지하기 위한 상설위원회를 두자고 제안했다. 국가 간에 무력분쟁이 일어나지 않게 언제든지 대화와 협력을 포기하지 말자는 뜻이었다.
둘째, 한-중-일 세 나라가 공동출자하여 거대 은행을 설립하고, 공동으로 화폐를 발행하여 서로 경제생활을 돕자고 했다. 그때는 유럽연합이 공동화폐 유로화를 발행하기 90년쯤 전이었다. 신식교육조차 변변히 받아본 적이 없는 안중근 의사였으나 동양평화에 대한 열망이 너무도 강렬하였기에, 국경을 초월한 동아시아 공동화폐까지 창안하였다.
셋째, 세 나라는 공동안보체제를 구축하고, 공동으로 평화유지군도 창설하는 것이 옳다고 했다. 참으로 탁견이었다. 우리가 진실로 동아시아의 평화를 원한다면 공동방어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은 과연 동양평화에 얼마나 진정성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끝으로, 안 의사는 뤼순에 설치될 삼국의 상설위원회를 명실상부한 국제기구로 키우자고 주장하였다. 로마 교황청 등 세계 각국의 공인을 받으면 그런 일도 가능할 것으로 전망하였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