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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의 시대, 안중근 의사를 다시 생각한다(2)

거듭 말하지만, 이런 주장을 펼쳤을 때 우리의 안중근 의사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의사는 <동양평화론>에 매달렸고, 100년이 넘게 지난 오늘날까지도 미완으로 남은 웅대한 포부를 제시하였다. 진정한 평화주의자가 아니고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거룩한 행보였다.
이런 안중근 의사를 일컬어, 일본의 극우파는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하고 있다. 이런 보도를 접하고 놀란 적이 있었다(YTN 뉴스, 2023년 1월 5일 9시 27분).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보니 별로 놀랄 일이 아니었다. 지난 2014년에 중국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기념관’을 개관하였을 적에 스가 요시히데(전 일본 총리)가 ‘안중근은 테러리스트’라는 망언을 쏟아냈다.
아마 우리나라의 뉴라이트 진영도 일본의 극우파와 별로 생각이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며칠 전 언론 보도에 따르면,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에서는 안중근 의사와 이회영 선생, 홍범도 장군과 김좌진 장군 등 7명의 독립영웅을 기념하는 ‘독립전쟁 영웅실’을 완전히 없애버릴 모양이다(한국일보, 2023. 10. 21). 7명의 독립영웅을 기념하는 공간이, “특정 시기 및 단체 관련 중복 및 편향성에 대한 우려”를 불러일으키므로 폐지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말이 안 되는 주장이다. 일곱 분의 영웅에게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인지, 하나씩 차분히 따져보아야겠으나 지면이 부족하므로 여기서는 안중근 의사에 한정해 논의해보자. 육군사관학교 당국은 ‘중복 및 편향성’이 문제라고 하였는데, 그럼 전국에 안중근 의사를 기념하는 곳이 한둘로 충분하다는 것인가. 기념시설의 중복이 문제라면 하필 육사의 기념공간을 철폐할 일이 아니지 않은가. 육사는 그저 단순한 일개 직업훈련 학교가 아니다. 거기서 길러낸 인재들이 장차 온 힘을 쏟아 국가를 지켜야 할 책무가 있다. 그런데 왜, 안중근 의사처럼 살신성인(殺身成仁)한 영웅을 기념하지 못하겠다는 말인가.
더구나 육사 측은 안중근 의사를 기념하는 일이 도대체 어떤 점에서 ‘편향성’이 문제라는 것인가. 동양의 평화를 위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한 안 의사요, 모두가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였으나 아무도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채 전전긍긍할 때 한 번의 의로운 행동으로 적들이 벌벌 떨게 만든 의사의 기개였다. 과연 어떤 점에서, 그리고 누구에게 그가 ‘편향적’이란 말인가.
애초 육사에 ‘독립전쟁 영웅실’을 설치한 것이 어느 한 사람의 뜻이었던가. 그 결정에는 국가적 염원이 담겨 있었다. 국민적 동의가 묵시적으로 깔린 결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 한 사람이 나서서 이처럼 중요한 시설을 멋대로 없앤다는 것이 될 일인가. 이것은 결국 육사 교장의 결정이 아니라, 윤석열 정권의 자의적 조치라고 볼 수밖에 없는 일이다. 뜻있는 시민들은 누구라도 5년짜리 윤석열 정권이 겁 없이 역사를 전복하려고 나선 게 문제라는 지적에 동의할 것이다.
역사학계의 원로요, 시민사회의 양심으로 존경받는 이만열(숙명여대 명예교수) 선생은 현 정권의 잘못된 역사 인식을 따끔하게 지적하였다. “식민지 경험을 가진 나라는 독립전쟁을 자신의 뿌리로 인정한다. 그럼에도 작금 대한민국에서는 ‘독립운동을 오히려 적대적인 세력으로 보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이만열, <윤석열 정부의 역사 인식과 식민주의 사관>, 시민언론 ‘민들레’ 2023. 10. 20.) 정확한 지적이다.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독립전쟁의 영웅들에게 ‘편향성’이란 멍에를 씌우는 사실을 보더라도, 이 정권의 핵심에서는 제나라 독립을 위해 싸운 안중근 의사조차 테러리스트로 간주하고 있다는 혐의가 짙다.
이만열 교수가 우려하였듯이 현 정권의 잘못된 처사는 여기서 멈추지 않을 전망이다. 앞으로, 그들은 뉴라이트를 앞세워 또다시 교과서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2020년대에 들어서자 20~30대 남성들이 보수화되는 추세를 타고 뉴라이트가 다시 득세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들은 수구언론 및 보수 기독계와 강력한 동맹체제를 형성한 상황이다(이만열, 앞의 글 참조). 그런 점에서 지금 육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어이없는 사태는 뉴라이트가 시도하는 역사전쟁의 서막에 불과한 것이리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안중근 의사를 부른다 “의사여, 의사여!”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우리의 안중근 의사가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지 100년도 넘었으나, ‘동양평화’라는 그의 진정한 꿈은 아직도 실현될 기미가 조금도 없다. 동아시아는 여전히 미국, 일본, 중국 및 러시아 등 강대국들의 패권주의에 사로잡힌 채 혼미를 거듭하고 있다. 그들의 싸움판에 낀 채 한반도는 두 개의 적대 국가로 분열되어 서로 대립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최소한의 평화조차도 언제 어떻게 될지를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게다가 우리 사회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협소한 지역주의와 파벌주의가 판을 친다. 당치도 않은 구시대의 낡은 이념 논쟁에, 상식적으로 보면 성립될 근거조차 희박한 부적절한 역사 논쟁으로 날을 샌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유롭고 독립된 조국을 염원”하였던 안중근 의사에게 너무나 죄송하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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