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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야 청산 가자, 범나비 너도 가자
가다가 저물거든 꽃에 들어 자고 가자.
꽃에서 푸대접하거든 잎에서나 자고 가자
白胡蝶汝靑山去, 黑蜨團飛共入山.
行行日暮花堪宿, 花薄情時葉宿還.
청구영언 - 작자 미상
나비에게 청산엘 가자 한다. 의인화로 노래를 시작하는 기법부터가 심상치 않은 비범함이 숨어 있다. 화자가 말하는 청산은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자연일 수도 있고, 마음의 안식처를 의미하는 이상향의 세계일 수도 있다.
곁에 있던 범나비에게도 함께 가자 한다. 청산이 얼마나 먼 길이길래 가다가 날이 저물면 꽃에 들어 자고 가자 한다. 게다가 행여 꽃에서 푸대접한다면 그때는 또 잎에서나 자고 가자 한다.
어찌 보면 무위자연(無爲自然) 하는 도가(道家)적 선풍이 진하게 느껴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청산(靑山)은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푸른 산이나 막연히 높은 산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 청산은 세속과 멀리 떨어져 인간의 발길이 함부로 닫지 않은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원시적 자연의 세계를 말하는 것으로 읽어야만 깊은 맛이 있다.
초장에서는 나비에게 가자 했다가 범나비에게도 가자고 한다. 이것은 ‘함께’라는 의미를 강조한 것으로 ‘특별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 ‘모두’를 뜻하는 것이다. 중장에서는 저물거든 꽃에 들어가 자고 가자 했는데, 그것은 청산 가는 길이 그리 가깝지만은 않은 먼 나그네의 여정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종장에서는 ‘푸대접’이란 말이 등장한다. 이는 청산에 가는 길이 소풍 가듯 즐거운 여행길이 아니라 서럽고 고달픈 길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백은 ‘별천지(別天地)’를 이렇게 노래했다.
“어찌하여 푸른 산속에 사느냐 묻기에, 대답지 않고 그저 웃으니 마음 자연 한가롭구나. 복사꽃 물에 떠서 아득히 흘러가니, 인간 세상이 아닌 별천지가 따로 있구나”
問余何事栖碧山, 笑而不答心自閑
桃花流水杳然去, 別有天地非人間
송(宋)나라 관사복(管師復)이 숭산(崇山)에 은거하였는데, 혹자가 그에게 물었다.
“산에 사는 것은 무슨 즐거움이 있소?” 그가 대답하였다.
“언덕에 덮인 흰 구름은 갈아도 다함이 없고, 연못에 가득한 밝은 달은 낚아도 흔적이 없다오.”
滿塢白雲耕不盡, 一潭明月釣無痕.
명(明)나라 팽대익(彭大翼) 때문에 유명해진 ‘경운조월(耕雲釣月)’의 고사가 여기서 나왔다. 구름을 갈고 달을 낚는 신선의 나라가 바로 이곳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곳은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요 국제슬로시티연맹에서 공식 인증한 ‘세계 슬로길 1호’라는 데 난 그런 것, 잘 모른다. 나는 여행 작가도 아닐뿐더러 공식이니, 정식이니 최초니, 1위니 하는 이따위 순위 매기기 좋아하는 중생들의 경쟁이 딱 질색이다. 그저 외로운 나그네에게 잠시라도 안식처가 되어 삶의 상처를 보듬어 줄 ‘위로’와 남은 생에 대한 ‘각성’을 주는 곳이라면, 그곳이 내겐 이 땅의 천국이다.
섬에 사는 사람은 섬을 떠나 봐야 비로소 섬의 모습을 알 수가 있다. 속세에 사는 사람은 세속을 떠나 봐야 비로소 자신의 내면세계를 볼 수 있다. 동파는 ‘제서림벽(題西林壁)’에서 여산(廬山)의 진면목(眞面目)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다.
“가로로 보면 마루 같고, 세로로 보면 봉우리로다. 멀고 가까운 곳 높고 낮은 곳, 보는 모습이 서로 다르구나. 여산의 참모습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단지 내 몸이 산속에 있어서라네.”
橫看成岺側成峰, 遠近高低各不同.
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山中.
고립된 섬에서 바닷속으로 석양이 가라앉고 어둠 속에 달이 떠오르자 그리운 얼굴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신기하게도 학교나 직장의 동료들은 한 놈도 생각나지 않았다. 보고 싶은 순서대로 전화번호를 누르고 싶었다. 그러나 그 번호는 이미 내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제야 나는 내 속에 그리움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섬에서의 절대 고립은 그 자체가 기도이고 호흡이다. 눈을 뜨면 천지 만물과의 교감이요, 눈을 감으면 신과의 소통이다. 40년 새벽기도가 헛되고 부질없는 것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일체중생(一切衆生)이 개유불성(皆有佛性)이요, 산천초목(山川草木)이 실개성불(悉皆成佛)이라”
이보다 더 큰 기도와 깨달음이 어디에 있겠는가?
공산에 비바람이 몰아치는데, 꽃은 떨어져도 쓸 사람이 없다네. 맑은 하늘에는 기러기 한 마리 빠져있고, 푸른 바다에는 삼봉이 솟아있다네.
空山風雨多, 花落無人掃.
靑天一雁沒, 碧海三峯出.
어떤 풀이라고 시들지 않는 꽃이 있겠으며, 어떤 날이라고 흐르지 않는 시간이 있겠는가? 꽃은 시들고 세월은 흐른다. 구름이 허공 속에 소멸되어 가듯, 인생도 세월 속에 소진하리라. 신선이 살 것 같은 오복동천(五福洞天)의 선원(仙源)에 속인들이 자본주의의 분비물을 흘려 놓았다. 잃어버린 것은 지평선만이 아니었다. 샹그릴라는 여전히 내 안에 있었지만, 눈을 감아야만 만날 수 있는 피안이었다. 오늘도 나는 여전히 죽을 자리를 찾아다니는 싸구려 낭만주의자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