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 지역, 문화, 민주주의가 무너진다(2)
원형을 유지한 국내 마지막 단관극장은 끝내 무너졌다. 무너진 것은 비단 낡은 건물이 아니라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 비민주성, 대화가 아닌 용역으로 대변되는 폭력성에 무너진 정치이자 지역사회에 대한 신뢰다.
또한 윤석열 정권과 지방선거를 휩쓴 국힘당 지방자치단체가 보여준 폭력적인 문화행정, 문화파괴 정책의 상징이며 시민들이 있는 광장을 거부하고 자기들끼리의 밀실을 고집하는 윤석열표 추모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역의 오래된 단관극장 철거를 둘러싼 갈등이 결코 지역 이슈에 국한되는 것만은 아닌 이유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내놓은 2024년도 예산안은 출판, 영화, 만화 등 문화예술계 여러 분야에서 처참하기 짝이 없다. 영화진흥위의 국내외 영화제 육성 예산은 절반으로 줄었고 지역 간 문화격차를 좁히고 지역 내 영화문화 발전을 위해 도입된 예산은 전액 삭감되었다. 문학나눔 도서보급 사업과 지역서점 활성화 예산을 전액 삭감하고 국민독서문화증진지원 사업은 5분의 1로 대폭 축소했다. 고등학생의 만평 ‘윤석열차’로 논란을 빚었던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예산도 절반이나 삭감되었다.
이에 호응하듯 지방자치단체들이 추진하던 영화제들이 속속 폐지되거나 대폭 예산 삭감되었다. 강릉시는 3년 동안 214편의 국내외 영화를 상영해온 강릉국제영화제를 폐지하고 그 예산을 출산장려정책에 쓰겠다고 발표했고 강원도는 평창국제평화영화제 예산지원 중단을 통보했다. 부산시도 부산독립영화제와 같은 중소영화제 예산을 30% 이상 삭감했다. 7년에 걸친 시민들의 아카데미 보존활동을 일거에 부정한 것도 경제논리였으며 영화제 예산지원을 중단하는 논리도 투입한 예산만큼 경제적 효과를 창출하지 못한다는 경제논리다. 설령 문화를 시장경제 논리로 본다 해도 그들의 논리가 얼마나 취약한지는 이미 경험칙으로 안다. 문화적 성취가 창출하는 경제적 가치는 눈에 보이는 성과 그 이상이라는 점, 국제영화제에서 인정받는다는 것은 국가적 위상이 높아지고 환산하기 어려운 경제적 효과로 이어진다는 것은 이미 확인된 바다. 편협한 경제논리를 들이대는 것은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K-무비가 하루아침에 이룬 성과가 아니라는 점, 시민이 주도하는 단관극장 콘덴츠가 구 도심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것을 애써 외면한 억지일 뿐이다.
가뜩이나 어려운 출판, 영화, 만화 등 문화예술계 여러 분야의 예산 삭감이 가져올 문화생태계 파괴는 심각한 문화 퇴행과 고사 위기로 이어질 것이다. 오는 11월 12일, 전국의 영화인들과 아카데미를 지키기 위해 혼신을 다한 원주 시민들이 원주 일원에서 극장 터로 행진하는 집회를 연다.
단체장의 확고한 의지대로 아카데미극장은 철거되었지만 원주시는 공유재산 처분과정에서의 절차 무시, 합리적 의사결정과정의 부재, 석면철거에 관한 법적 규제를 지키지 않고 철거를 강행했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시민들은 철거로 다 끝난 일이 아니라 위법을 규명하기 위한 시작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원주시장으로선 뇌관 하나를 품은 셈이다. 시민들은 극장을 잃었지만 원주시는 끝까지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행정으로 지역민의 신뢰를 잃었다.
‘극장’은 비극을 상연한 고대 디오니소스극장에서 비롯된 것으로 무대와 관람석 사이에서 춤추는 곳이라는 뜻의 반원형 오르케스트라와 앞쪽에 코러스가 대기했다가 무대 위로 나왔다 들어가는 스케네(여기에서 스크린 screen과 장면을 뜻하는 scene이 만들어졌다), ‘언덕 위 보는 곳’이라는 의미의 테아트론(Theatron)이 있는 구조다. 극장 Theater의 어원이기도 한 것처럼 극장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관람석’이라는 것, 권력을 장악한 정치인들은 스크린을 독점하는 게 아니라 잠시 무대 위로 나왔다 들어가는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누구든 스크린에 영원히 머무는 장면이란 없다는 뜻이다.
이 간단한 진실을 잊는 자들의 말로가 어떠했는지 말하는 것은 진부한 일이 될 테지만 대통령이든 시장이든 권력은 유한하고 국민과 시민은 영원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시민의 중요한 책무라 할 것이다. 학교 졸업식이나 웅변대회, 강연회가 개최되고 시민 노래자랑이나 1군사령부 군악대 공연이 열리는 지역의 문화거점이기도 했다.
이처럼 극장은 지역민들의 일상과 만나면서 지역의 정체성과 여러 세대에 걸친 기억의 공간이라는 상징성을 갖는다. 고려극장이 연해주와 카자흐스탄에서 고려인의 정신적 문화적 정체성의 중심이었던 것처럼 아카데미극장은 60년대 급격한 산업화 과정을 거치는 동안 3세대가 기억을 공유하는 몇 안 되는 공간으로서 기능해왔던 것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