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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튼수작 - ‘작(酌)’에 관한 단상

나의 지인 중에 평소의 말버릇이 아주 독특한 사람이 있다. 뭔가 자기에게 관심을 나타내거나 반가운 인사치레 말이라도 건널 때면 으레 하는 말이 “이게 어디서 허튼수작이야”라고 하여 종종 헛웃음을 짓게 한다.
우리는 때로 ‘허튼수작’이니, ‘개수작’이니 하는 등의 말을 듣게 된다. 그렇다면 ‘수작’이란 말의 의미는 무슨 뜻일까?
‘수작’의 한자어에는 부수가 모두 술 ‘주(酒)’ 자가 들어가 있다. 술과 관계가 있다는 뜻이다. ‘수(酬)’는 갚다, 말을 주고받다, 보답하다 등의 의미이고 ‘작(酌)’은 따르다, 잔질하다 등의 의미이다. 다시 말해 ‘수작(酬酌)’은 서로에게 잔을 주고받는 행위를 일컫는 것이다.
‘짐작’하다 할 때의 ‘짐(斟)’은 술을 따르다, 헤아리다 등의 의미이다. 술잔이나 술병에 있는 술의 양을 미루어 헤아린다는 의미이다. 고대의 술잔이나 술병은 요즘과 같은 유리잔이나 크리스탈이 아니어서 상대의 남은 잔이나 호리병 속의 술의 양을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을 헤아려서 살피는 것이 ‘짐작(斟酌)’인 것이다.
정상을 ‘참작’하다 할 때의 ‘참(參)’ 은 헤아린다는 뜻으로서 상대의 주량이나 취한 상태의 정도, 그리고 술좌석의 분위기나 동석한 사람 등의 상황을 고려하고 살펴서 잔을 따른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정장을 참작(參酌)한다.’라는 법률용어가 파생된 것이다. 한편 상대에게 술을 따를 때 오른손 아래로 왼손을 바쳐서 술잔을 올리는 풍습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상대에게 공경을 표현하기 위해 단순히 두 손으로 따르는 것일까?
어떤 이는 술병의 상표를 가리지 않고 두 손으로 따라야 한다거나 왼손으로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가려서 따라야 한다는데 이는 모두 낭설에 불과하다.
이유는 단순하다. 한복의 도포 자루가 넓어 음식에 닿을까 왼손으로 도포 자루를 감싸며 잔을 따랐던 데서 연유한 것이다.
대체로 남자들이 술을 마시는 술집에는 때로 손님을 접대하고 술 시중을 드는 여자가 있게 마련인데, 이런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을 ‘작부(酌婦)’라 하였다. 고문서를 읽다 보면 종종 이런 유의 여인을 매우 점잖게 표현한 전문용어가 있다.
이른바 ‘조음지좌(助飮之佐)’라는 것이다. 그 단어의 속뜻은 ‘마시는 일을 돕는 보좌관’이란 소리이다. 신분 사회의 계급적 질서와 차별을 느끼게 하는 언어유희이다.
어쨌거나 술좌석의 분위기를 ‘참작(參酌)’하거나 술병의 양을 ‘짐작(斟酌)’하지 않고 ‘작부(酌婦)’가 권하는 ‘수작(酬酌)’에 무작정(無酌定) 마시다 보면 반드시 낭패(狼狽)를 당하기가 십상인 것이다. 
모든 음식은 자신이 먹을 만큼 스스로 자기의 그릇에 담아 먹는데 왜 유독 술만은 꼭 남이 채워주고 권해야 먹게 되는 것일까?
가령 어떤 이가 ‘나는 꽃을 사랑한다.’라고 하면서 꽃에 물 주기를 잊어버리는 사람이 있다면 과연 그를 진정으로 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꽃에게 필요한 것은 꽃이 좋다고 느끼는 ‘제 3자적 감정’이 아니라 꽃에게 필요한 것을 직접적으로 채워주는 ‘당사자적 행위’인 것이다.
그렇다면 술은 왜 마시는가? 아마 배가 고파서 술을 마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충분한 먹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술을 찾는 까닭은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증명하고픈 사회적 ‘만남’을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만남이란 사랑을 위한 전제의 단계이며 사랑의 첫 단계는 언제나 만남이라는 관계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사랑의 열매는 관계의 유지만으로 이루어지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 반드시 채움이 필요한 것이다.
꽃에게 ‘물’이 필요하듯 사람에게도 ‘정(情)’이라는 물질이 필요한 법이다. 술은 상대에게 감정의 메신저가 되어 정을 채우는 매개물이 되기에 충분하다. 상대에게 술을 따르는 행위는 꽃에게 물을 주는 행위에 비견될 수 있다. 사랑을 채우고, 정을 채우는 자기애적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혼·술’은 만남을 배제한다는 데서 고립과 자학의 냄새가 물씬 흐른다. 어쨌거나 이러한 채움과 비움의 반복된 행위를 통해 서로의 관계가 긴밀해지기를 추구하는 것이 이른바 ‘수작’이란 것이다.
일찍이 노자는 말했다. “위학일익(爲學日益)이요, 위도일손(爲道日損)이라” 학문을 하는 것은 날마다 채우는 것이요, 도를 닦는 것은 날마다 비워내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날마다 채우고 비우는 일을 반복해야 아름답다. 우리의 육체 또한 섭생과 배설을 반복해야만 건강이 유지되는 법이다.
자신의 경험과 지식, 명예와 부를 쌓는 일도 매우 중요하지만, 욕망을 비워내는 일은 그보다 더욱 힘들다.
성공에서 물러나 ‘공수신퇴(功遂身退)’ 하는 일이야말로 채우고 쌓아 올리는 일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진실 하나는 ‘채운 사람만이 반드시 비울 자격이 있다’라는 오묘한 이치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수작’과 ‘짐작’ ‘채움’과 ‘비움’ 잔을 채우기 위한 ‘수작’과 잔을 비워내기 위한 ‘짐작’
올여름 건배사는 서로의 관계를 위하여 “수작하세” 서로의 마음을 위하여 “짐작하세”
좋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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