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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대사(義湘大師)가 입당구법(入唐求法)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을 친견하기 위하여 동해 변에서 참배할 때, 7일 밤낮을 기도하였어도 끝내 관음(觀音)을 보지 못하자 그대로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때 홍련(紅蓮)이 바다에서 피어나 의상을 건지고 그 속에 나타난 관음보살이 수정염주(水晶念珠)를 주면서 의상의 높은 신심을 찬양하였다 한다.
이후 의상은 그곳에 터를 닦고 암자를 세워 이름을 홍련암이라 지었으며, 관음보살이 산다는 전설 속의 신산 ‘보타낙가산(普陀洛伽山)’에서 이름을 따와 굴이 있던 양양의 해안언덕을 ‘낙산(洛山)’이라고 명명했다고 하는 것이 『삼국유사(三國遺史)』의 「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에 나오는 설화이다. 낙산사가 관동팔경의 하나로 꼽히는 것도 단연 ‘의상대’와 ‘홍련암’ 일대의 절경 때문일 것이다.
‘원효(元曉)’가 민중들과 함께 어울리며 불교를 대중화했다면 ‘의상(義湘)’은 불교 교리의 이론을 확립하여 신라 교종의 틀을 완성해낸 인물이다. 의상은 특히 불교의 화엄(華嚴) 사상을 강조하였다. 화엄 사상이란 ‘모든 것이 상호의존적인 관계에 있다.’ 라는 전제 아래 끝없는 조화를 중시한다.
문수사리가 유마힐에게 ‘불이법문(不二法門)’을 물었을 때 유마힐은 오직 ‘묵연(默然)’하였다. 이 침묵의 깊이와 무게를 측량할 길이 없어 문수사리는 ‘유마의 침묵, 그 소리는 우뢰와 같다’라고 찬탄했다.
그의 깨달음의 핵심은 본질과 현상은 ‘상즉상입(相卽相入)’하여 동일하다는 것과 “일체법이 ‘공(空)’하여 그 자체의 고유한 성질을 갖고 있지 않기에 생멸 변화를 넘어서 ‘무생법인(無生法忍)’ 하다는 것이다.
오래 전 내가 박사 과정생이었을 때 타교 교수님의 불교사 번역 수업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이 선생님은 매우 특별한 이력이 있으신 분이었다. 학생 시위 전력으로 수배를 받아 3년간 사찰에 숨어 지내다 불경을 공부하게 되었고 훗날 일본에 가서 불교사를 전공하여 교수가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아내는 현직 목사였다.
하루는 학교 뒤의 ‘보타사’라는 절에서 현장 수업을 하였는데 당시 나는 보수 기독교 교단의 꼴통 신자여서 절에서의 현장학습을 노골적으로 불쾌하였다. 그러나 내심 한편으론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지, 불자들의 신심은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매우 궁금하였다. 우연히 사찰 마당에 가득한 연등과 거기에 달린 기도문을 보고 매우 호기심 있게 읽어 보았다.
대략 나는 이런 상상을 했다. 인연의 번뇌를 끊게 해달라든가, 업장 소멸을 이루게 해달라든지, 공 사상과 무소유의 사상을 실천할 능력을 달라던지, 내 안에 욕망을 소멸시켜 달라는 등의 기도문 등을 기대했다. 그러나 연등에 매달린 기도문은 ‘수능합격’, ‘사업번창’, ‘가족건강’, ‘창업대박’ 등의 발복 기원이 전부였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절에는 더 이상 부처가 없음을 확신하였다. 예수가 떠난 교회에 복을 비는 할렐루야 아멘 소리만 무성하고, 부처가 없는 절간에는 관세음보살 하는 염불 소리만 난무할 뿐이었다.
마음의 욕망과 ‘유심(有心)’을 떨쳐 내고 화엄의 요체인 ‘유심(唯心)’을 이루고자 어두운 새벽을 가르며 동해의 후미진 절벽에까지 달려왔다. ‘홍련암’에 이르자 복을 받겠다는 인파는 장사진을 이루었고 참배를 하는 인파와 관세음보살 하는 염불 소리가 법당을 가득 메웠다.
복을 주는 주체는 누구인가? 부처인가? 예수인가? 하릴없는 생각으로 힘없이 산에서 내려왔다. 농사의 주체는 당연히 농부여야 한다. 씨앗은 심는 대로 난다.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난다. 만고불변의 이치는 심는 대로 거두는 것이다. 삶의 이치도 마찬가지이다. 삶의 주체는 ‘나’이다. 선을 심었으면 선의 대가를 받을 것이요, 악을 심었으면 악의 대가를 받는 것이 천지의 이치일 뿐이다.
심지 않는 데서 거두고자 하는 것이 요행이고, 미혹이며, 사기이다. 실존하였던 인간 예수의 정신을 따르려 하지 않고 증명되지 않은 부활의 예수를 좇겠다는 것 또한 삿된 꿈이요 허상이다.
불국(佛國)도 공화(空花)요, 열반(涅槃)도 작몽(昨夢)이라, 부활(復活)도 공화(空花)요, 재림(再臨)도 작몽(昨夢)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