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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 봄’ : 민주시민의 눈물(1)

‘서울의 봄’이란 영화가 장안의 화제를 모으고 있다. 영화를 보며 울었다는 이들도 있다. 날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려고 줄을 선다. 도대체 이 영화의 매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역사가인 내 생각에는 적어도 다음의 네 가지 이유가 있어 보인다. ‘속이 터져 죽는 줄 알았다’고 탄식하면서도, 시민들이 이 영화를 남에게 추천하는 이유가 참 많은 셈이다. 그러나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것은 우리 시민들에게 역사적 성찰의 힘이 있다는 말이다. 자, 이야기의 보따리를 풀어보자.
첫째,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현재의 윤석열 정권은 군사독재정권의 후예이다. 한국 정당의 역사를 살펴보면, 국민의힘은 전두환이 만든 민주정의당의 후예이기도 하고 박정희의 권력 기반인 민주공화당의 계승자이기도 하다. 민주정의당 이후에도 이 당의 명칭은 민주자유당,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미래통합당 등으로 변해왔다. 그래도 그 뿌리는 전두환과 박정희이다. 그들을 지지하는 시민의 정치적 성향도, 큰 틀에서 보면 과거나 지금이나 거의 같으며 지역적 기반도 일치한다. 영화 ‘서울의 봄’이 주목한 전두환의 쿠데타는 지나간 옛날이야기이면서도 현재와 연결고리가 있다. 그때는 그때이고 지금은 지금이라며, 혹자는 국민의힘을 전두환이나 박정희와 관계짓는 것이 무리한 일이라고 반박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나라당을 이끈 박근혜가 누구인가. 그는 박정희의 정치적 상속자였다. 아버지의 정치적 후광을 배경으로 삼아 대통령으로 뽑히기까지 하였다는 사실을 누가 부정할 수 있는가. 많은 시민들이 영화를 보고 “이 기회에 한국 현대사를 제대로 공부해 봐야겠다”고 한다. 정치적으로 불리한 일이 있기만 하면 당명을 바꾸어서 시민을 현혹하는데 익숙한 사람들. 그들의 역사를 특징지은 ‘악의 뿌리’, 그들의 흑역사를 이번 기회에 제대로 정리해 보겠다는 시민이 많아서 다행스럽다.
둘째, 현재는 권력층의 핵심부에 검찰 특수통 출신이 망라되어 있다. 그럼 검찰이 언제부터 한국 정치의 주역으로 떠올랐는가. 군사독재 시절부터였다. 독재자는 검찰을 수족처럼 부리며 야당을 탄압하였고, 민주화 세력을 함부로 짓밟았다. 사람들은 그런 전두환이나 박정희, 노태우 같은 군사독재자들을 목소리 높여 비판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주구(走狗)가 되어 민주시민과 학생 및 노동자를 함부로 체포, 연행하고 고문을 통해 사건을 무리하게 조작한 자들이나 그들의 만행에 눈 감고 구속, 기소, 유죄판결을 내린 법 기술자들에게는 책임을 묻지 못한다. 과거 독일에서도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 붕괴하고 나서 검사, 판사 또는 변호사로서 악의 세력에게 봉사한 사람을 단 한 명도 벌주지 못한 역사가 있기는 하다. 다른 유럽 국가에서도 법조인은 무소불위의 특권을 행사해온 전통이 없지 않다. 그러나 현대 한국에서처럼 검찰이 노골적으로 권력과 밀착한 예는 어떠한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비슷한 예를 찾을 수 없다.
영화 ‘서울의 봄’은 무자비한 군사독재정권의 탄생을 그린 것이다. 거기에는 검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를 보며 시민들은 장차 군사독재정권의 수족이 되어 ‘호가호위(狐假虎威, 여우가 호랑이의 힘을 빌려 호기를 부림)’하게 될 검찰을 떠올리는 것이다. 실제로 군사정권의 말기에 이르러 공안검사의 권력은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가 되었다.
셋째, ‘서울의 봄’에서 거듭 확인되듯 전두환 일당이 쿠데타에 성공한 데는 ‘하나회’라고 불리는 군대 내 사조직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이것은 본디 독재자 박정희가 키운 친위조직이었고, 1973년에 일어난 이른바 ‘윤필용 사건’을 계기로 해체된 것으로 알려졌다. 윤필용이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반대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군부 내에 여전히 살아 있는 막강한 조직이 ‘하나회’였다. 독재자 박정희는 자신의 영구집권을 보장하는 방법으로 친위세력인 ‘하나회’를 필요로 하였다. 바로 그 모임의 중심에 전두환이 있었다. 그로 말하면 청년 시절부터 평생을 정치군인으로 살았다고 해야 맞다.
그와는 대척점에 선 장태완이란 군인은 누구인가. 그는 청년 시절부터 군인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완강히 반대하였다. 강직하고 청렴한 장태완이었다. 이 군인에게는 군대 내에 이익을 함께 나눌 사적 조직을 만든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믿고 의지한 것은, 오직 합리적인 법과 제도 그리고 윤리적 가치뿐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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