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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월 12일 밤에 전두환은 ‘하나회’를 이끌고 국가권력을 찬탈하려 할 때 그를 믿고 따르던 부하 장군들은 수적으로 많지 않았다. 그 당시 대통령 최규하는 전두환이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아무런 대응조치도 하지 않았다. 국가를 보위해야 할 대통령이 책임을 저버린 것이다. 최규하의 역할은 전두환의 승세가 완전히 굳어질 때까지 군부 쿠데타에 대한 승인을 보류하는 정도에 그쳤다. 군부를 통제할 위치에 있었던 국방부 장관 노재현도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하였다. 계엄 부사령관도, 육군본부의 고위 장성들도 적극적으로 쿠데타를 막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회’가 일으킨 쿠데타의 불법성을 알았으면서도 그저 일신의 안위를 위해 몸을 사렸다.
‘서울의 봄’을 보고 난 시민들은, 문재인 정권 말기에 일어난 여러 의문스러운 사건들을 떠올린다. 그때 조국과 추미애는 왜, 사법개혁에 실패하였을까. 윤석열과 이익을 공유한 검사들이 ‘검사동일체’라는 주문을 외우며 자신들의 집단적 이익을 사수하는 동안에 한국의 대통령 문재인은 무슨 조치를 하였던가. 여당인 민주당 지도부는 과연 어떤 대책을 내놓았던가. 조국과 추미애는 검찰이란 강고한 이익집단을 상대할 수 있는 어떤 무기를 가지고 있었던가. 그들이야말로 합리적인 법과 제도 그리고 윤리적 가치만을 믿고 무모한 싸움에 뛰어든 것이 아니었던가.
12·12 사태 때, 전두환 일당은 장태완 장군을 너무도 간단히 제압하였다. 검찰총장 윤석열이 조국과 추미애 장관을 축출하는 일도 그만큼이나 쉬운 일이 아니었던가. 결과적으로, 장태완은 군사쿠데타를 막을 수 없었다. 한 사람의 충직한 장군이 법과 양심을 믿고 ‘하나회’와 싸워 이길 수는 없었다. 조국이나 추미애, 또는 이재명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익을 중심으로 굳게 뭉친 검찰을 그들이 무슨 방법으로 싸워 이기겠는가. 어떤 시민은 ‘서울의 봄’을 보며 분한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고 말한다.
끝으로, ‘서울의 봄’이 다룬 ‘12·12’에 앞서 박정희도 ‘5·16’ 군사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쥐었고, 전현직 장성들에게 자신의 권력을 나누어주며 장기집권 체제를 구축하였다. 박정희가 장기 독재 끝에 비참한 최후를 맞은 사실을 직시하고, 전두환은 단임제로 선회하였다. 그는 집권에 공이 큰 노태우를 차기 집권자로 내정하여 퇴로를 보장받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임기가 길든 짧든, 군사독재자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언론 탄압이다. 정적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시민들의 뜻을 왜곡한다.
시민들은 ‘서울의 봄’에 분통을 터뜨리며, 지금의 검찰독재도 군사독재와 공통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의 주류 언론은 신뢰도가 형편없이 낮은데, 그 까닭은 그들이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데 있다. 겉으로 보면, 누구라도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하고, 정치적으로도 거리낌 없이 자유를 누리는 듯하다. 그러나 실상을 파고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시간이 갈수록 입에 재갈이 물리고 손발이 묶인 것과 다름없는 상태가 되고 있다. 과거에는 군인이란 특수 신분의 엘리트가 국가를 사적으로 점유하였다면, 이제는 검찰이란 특수한 부류의 엘리트가 행정, 입법, 사법을 총망라해 지배권을 독점하고 언론까지 장악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비극이 아니다. 검찰은 군사독재가 처음 시작된 1960년대 초반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려 60여 년에 걸쳐 군사정권의 통치방식을 충실히 학습하였다. 영화 ‘서울의 봄’은, 전두환 일당이 군사독재를 부활시키는 데 성공한 사실이 역사의 비극이란 것을 뚜렷이 보여주면서. 동시에 지금 우리가 당면한 현실의 문제는, 윤석열의 집권으로 군사독재의 개정판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검찰 독재는 한국사회가 진정한 민주주의로 가는 길에 마지막으로 맞닥뜨린 장벽이랄 수 있다. 누가 이 장벽을 깨뜨릴 것인가. 시민 자신의 힘이 아니고서는 아니 될 것이다. 무릇 독재란, 시민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 될 때까지 형식을 바꾸어가며 계속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