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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례 위성정당 문제에 대하여(1)

2022년도 수출 세계챔피언은 중국이다. 수출 점유율이 세계 수출총액의 15퍼센트에 육박했다. 2위 미국의 점유율은 8퍼센트 조금 넘었고, 3위 독일은 7퍼센트가 채 되지 않았다. 원래 그런 건 아니었다. 중국이 시장경제체제로 전환해 국제 분업 시스템에 들어오기 전에는, 냉전체제가 무너지고 신자유주의가 대세를 이루면서 미국의 수출 규모가 커지기 전까지는 오랫동안 독일이 수출 챔피언이었다. 그때 독일 사람들은 어떤 수출품을 최고의 자랑거리로 여겼을까. 벤츠 승용차도 아니고 지멘스의 고속전철도 아니었다. 선거제도였다.
1990년대 초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졌다. 동유럽 옛 사회주의 국가들은 일당독재를 철폐하고 다당제와 자유선거를 도입하면서 대부분 독일 선거제도를 그대로 또는 살짝 바꾸어 도입했다. 독일이 어떤 나라인가. 히틀러의 전체주의 독재를 세웠고,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홀로코스트를 저질렀고, 그래서 세계인의 손가락질을 받았던 정치 후진국이었다. 그런데 불과 40여 년 지난 시점에서 민주주의 모범이 될 만한 선거제도를 정착시킨 선진국으로 인정받았다. 어찌 자랑스럽지 않았겠는가.
독일의 권력구조는 연방정부와 주정부 모두 내각제다. 선거제도 역시 똑같은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시행한다. 1949년 독일연방공화국을 수립한 이래 둘 모두 단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 독일 선거제도의 핵심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유권자는 지역구 후보와 정당에 각각 투표한다. 지역구 당선자는 첫 번째 표가 결정한다. 그러나 정당의 의석수는 두 번째 표가 좌우한다. 정당 득표율이 5퍼센트가 넘으면 의원 정수에 두 번째 표 득표율을 곱한 만큼 의석을 받는다. 지역구 당선자가 할당 의석보다 적을 경우 그 차이만큼 권역별 비례대표 의석을 받는다. 녹색당과 자유민주당은 지역구 당선자를 한 명도 내지 못했지만 이런 제도 덕분에 50석 안팎의 의석을 획득해 사민당과 기민당의 연립정부 파트너로 집권당이 되었다. 가끔 어떤 주에서는 지역구 당선자가 정당 득표율에 따른 의석수보다 많은 경우도 생긴다. 그럴 때는 비례 의석을 주지 않으면서 지역구 당선자는 인정한다. 이른바 ‘초과의석’이다. 이 때문에 연방의회 의원 정수는 6백 명이지만 실제 의원 수는 더 많을 수 있다. 
동유럽 국가들은 왜 하필 독일 제도를 받아들였을까? 민주주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영국과 미국의 비례대표 없는 소선거구 제도를 어째서 외면했을까? 독일 시스템이 더 ‘좋은’ 선거제도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독일은 정치가 매우 안정되어 있다. 연방총리를 비롯한 주요 정치인의 자질과 능력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당이 잘 발전했다. 특정 정당이 연방의회 과반 의석을 얻은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성향이 비슷한 정당끼리 원만하게 소연정을 이루었다. 어떤 이유 때문에 소연정으로 다수파를 만들 수 없을 경우에는 기민당과 사민당이 대연정을 한다. 독일 사회는 시민의 자유를 높은 수준에서 실현했고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으며 필요한 개혁과제를 늦지 않게 해결했다. 독일은 부러워할 만한 나라였으니, 그들이 독일 선거제도에 호감을 느낀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오직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론적으로 보아도 독일만큼 합리적이고 정교한 선거제도를 가진 나라는 없다. 그래서 우리 국회도 4년 전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라는 이름으로 독일식 제도를 일부 받아들였다. 하지만 모두가 아는 것처럼 여야 거대정당들이 비례용 위성정당을 띄운 탓에 제도 개선은 아무 효과도 내지 못했다. 하지만 제도 자체는 선거법에 엄연히 살아 있기 때문에 제22대 총선이 넉 달 앞으로 다가온 지금 여야 정치인들은 이 제도를 어떻게 할지 본격 논쟁을 시작했다. 사실은 복잡하지 않은데, 마치 복잡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이가 많다. 그래서 오늘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이 문제를 판단해야 할지, 내 생각을 요약해서 말해 보려고 한다.
‘좋은 정치’를 원하시나요? 이렇게 물으면 대답은 만장일치다. 나쁜 정치를 원한다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의미는 없다. 어떤 정치가 ‘좋은 정치’냐고 물으면 저마다 다른 주장을 하기 때문이다. ‘좋은 정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사람 수만큼 많은 견해가 있다. 그렇다면 ‘좋은 정치’를 객관적으로 정의(定義)하는 건 불가능한가? 아니다. 할 수 있다. 널리 받아들여지는 정의는 이렇다. “국가 운영에 대한 시민의 다양한 소망과 요구를 최대한 있는 그대로 반영하고 실현하는 정치.” 어떤가? 만사를 내 맘대로 하는 게 좋은 정치라고 믿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는가.
만인의 요구를 살피고,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정치를 ‘좋은 정치’로 규정한다면 ‘좋은 선거제도’ 또한 객관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 집단적 의사결정 이론에 ‘불가능성 정리(定理)’라는 게 있다. 1972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애로(Kenneth Arrow)가 증명한 바에 따르면, 셋 이상의 선택지가 있는 경우 ‘어떤 상황에서도 다른 방식보다 우월한’ 의사결정 절차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정리를 선거제도에 적용하면 이렇게 된다. “어떤 조건에서도 다른 모든 선거제도보다 합리적인 결과를 보장하는 선거제도는 없다.” 그렇다면 선거제도는 좋고 나쁨이 없다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앞에서 말한 의미의 ‘좋은 정치’를 북돋우는 선거제도는 ‘좋은 선거제도’이고 그렇지 않은 제도는 ‘좋지 않은’ 또는 ‘나쁜 선거제도’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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