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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역설

2천 년 전, 예수는 정치적인 이유로 로마에 의해 사형을 당하였다. 그런데 예수는 왜 부활을 해야만 했을까? 예수의 부활을 간절히 원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자신인가? 로마제국인가? 유대인인가? 제자들인가?
이른바 「부활장」으로 불리는 고린도 전서 15장에는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다. “게바에게 보이셨고, 열두제자에게 보이셨고, 오백여 형제에게 보이셨고, 야고보와 사도에게 보이셨고, 맨 마지막으로 나(바울)에게 보이셨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주장하는 간증이요, 신앙고백이다.
예수는 무엇 때문에 부활을 해야만 했을까? 자신이 무죄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일까? 그렇다면 극비리에 나타나 제자들에게만 보일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죽인 정적이었던 로마의 ‘빌라도’나 ‘헤롯’ 또는 유대의 ‘대제사장’이나 율법 학자인 ‘바리새파’나 ‘사두개파’ 등에게 나타나 자신을 보였어야 만 하지 않았을까? “내가 바로 너희들이 죽인 예수다”하고 당당히 자신의 존재를 입증했어야 옳은 것이 아닌가?
아니면 자신이 ‘신(神)’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을까? 그렇다면 도마에게 ‘옆구리에 찔린 창 자국 만져 봐라’하고 쪼잔하게 인간적으로 말할 것이 아니라, 당대의 영향력 있는 군상들 앞에서 신적 권위를 가지고, 신만이 할 수 있는 위대한 선포를 했어야 만 하지 않았을까? 가령 다시는 이 땅에 “지진이나 화산 폭발 등의 천재지변에 대한 공포가 없게 하겠다”라든지, “인류에게 기아와 전염병을 영원히 없게 해 주겠다”라든지, “인간의 언어를 하나로 통일시켜 주겠다”라든지, 신(神)만이 할 수 있는 신적 능력으로 자신이 창조한 세상의 오류에 대해 특별한 A/S를 해 준다거나 미래 인류의 삶에 대한 새로운 언약 등을 제시했어야 옳지 않았을까?
만약에 그랬더라면, 예수의 부활에 대한 역사성은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었을 것이고, 탈무드를 비롯한 고대 랍비들의 문헌에 수도 없이 예수의 부활이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유대교’는 유대 땅에서 더 이상 존재하기 힘들었을 것이며, 바울이 선교 여행을 할 필요조차 없이 유대인 전체가 ‘기독교’로 개종하였을 것이다. 만일 예수가 ‘빌라도’나 ‘헤롯’에게 나타나 그들을 회개시켰더라면 200년에 걸친 로마의 박해는 일어나지 낳았을 것이며, 인류 역사상 최악의 비극인 홀로코스트와 같은 6백만 유대인의 학살은 결단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부활 후 40일이나 되는 동안 극비리에 다니며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하늘로 올라가며, 내가 곧 다시 와서 그때는 반드시 불신자를 심판하겠다고 협박이나 하고 승천했다면 인류를 사랑하는 신이라기보다는 복수를 다짐하고 돌아가는 쪼잔한 인생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최소한 자신을 장사 지내준 ‘아리마대 요셉’에게라도 나타나 가족조차 하지 못했던 목숨을 건 믿음에 대해 ‘고맙다’라는 인사 정도는 하고 갔어야 인간적 도리가 아닌가?
만일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예수의 40일간의 행적은 매우 중차대한 문제이다. 공관복음서보다 훨씬 더 큰 비중으로 「부활 복음서」가 따로 존재했어야만 했다.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과 감격스러운 상봉을 하고, 그들과 함께 온갖 기적과 이적을 보였어야 했으며, 유대와 로마는 걷잡을 수 없는 공포에 휩싸여 온 천지에 ‘회개’ 운동이 일어났어야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당시의 유대와 로마는 아무도 예수의 부활을 알지 못했다. 예수의 부활을 주장하는 사람은 소수의 예수의 제자들에 불과하였다. 일련의 제자들과 바울의 교조주의적 세뇌 때문에 부활에 대한 맹목적 믿음은 교리가 되었고, 구원의 조건과 상징이 되어버렸다. 만일 자신이 진정으로 올바른 기독교인이라 한다면, 증거가 전무한 예수의 ‘육체의 부활’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검증된 실존적 ‘예수의 정신’을 부활시켜야 함이 옳지 않은가?
진리는 ‘예수의 말씀’이지 ‘바울의 신앙고백’이 아니다. 바울 역시 ‘5욕 7정’에서 자유롭지 못한 한낱 오류투성이의 인생에 지나지 않는다. 바울의 서신 어디에도 “예수 가라사대”라는 메시지는 없다. 그는 예수에게 가르침을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며, 직접 만난 적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다메섹 도상에서 빛으로 나타난 예수의 환영을 보았다고 하는 것 또한 자신의 영적 체험에 관한 주장에 불과할 뿐, 그 말을 증명해 줄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사도로서 자신의 존재를 부각하며, 신자들에게 부활에 대한 자신의 신앙고백을 세뇌시키고자 하는 바울의 술책이요, 기만이며, 협박에 불과하다.
설령 부활이 사실이 아닐지라도 실존적 예수의 말씀은 얼마든지 가치 있는 진리이며, 예수의 생애를 믿는 기독교인은 결코, 불쌍한 존재가 아니다. 부활이 구원의 절대 조건이라면 신은 결코, 이렇게 허술한 증거로써 인류에게 구원을 약속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충분한 증거도 제공하지 못하면서 부활의 믿음만을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워 신이 인간을 심판할 것이라는 바울의 논리에 절대 나는 동의할 수가 없다. 그건 신의 인류에 대한 공갈과 협박이지, 결코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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