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는 소송당사자임에도 법원의 판결에 개입해 자국의 피고 전범기업에 판결을 따르지 말라고 강요하는 불법적인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 당초 일본기업이 지원재단에 기금을 출연할 것이라는 한국의 정부와 일부 국내 일본 전문가들의 순진한 기대가 어긋난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까지 일본정부의 과거사 사과를 이끌어낸 것은 한국 정부와 시민사회, 그리고 일본 시민사회의 끈질긴 노력 덕분이었다. 일본 정부는 고노 담화(1993)에서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했고, 무라야마 담화(1995)에서는 전쟁범죄에 대해 사죄했다.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1998)은 식민지 지배에 따른 한국 국민의 손해와 고통에 대해 사죄를 표명하였다.
2011년 8월 헌법재판소는 "위안부 문제의 외교적 해결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고, 이로 인해 박근혜 정부 때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한일관계의 최대 쟁점으로 떠올랐다. 당시 일본은 현안-과거사를 분리해 양국이 현안에서 협력하자고 주장한 반면, 박근혜 정부는 위안부 문제 해결 없이는 현안에 협력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이었다. 결국 2015년 12월 일본 총리가 공식사과하고 일본국가예산으로 10억 엔을 출연해 화해치유재단을 만들어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지원하는 선에서 합의가 이루어졌다.
2018년 10월 대법원판결로 강제동원피해자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자, 문재인 정부는 과거사와 분리해 현안 협력을 제안했으나, 아베 정부는 한국 정부가 강제동원피해자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않는다면 현안 협력도 불가하다며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식민지배의 합법성을 근거로 한 일본 측 주장은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관련된 사안이어서 문재인 정부는 받아들일 수 없었고, 불가피하게 양국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 때문에 국내 전현직 외교관이나 소위 일본 전문가 중에는 사법부가 불필요하게 외교 문제에 개입함으로써 한일관계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전문가는 고도의 정치성을 갖는 국가기관의 행위는 사법심사가 제한된다는 통치행위이론을 내세워, 사법부가 한일청구권협정과 같은 외교 행위에 반하는 판결을 내놓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법원이 반대의 판결을 내렸다고 생각해 보자. 대법원이 일본법원 판결을 인정하는 순간, 일본 측은 한국 대법원도 식민지배의 합법성을 인정하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는데 왜 불법이라고 주장하느냐고 선전할 게 분명하다. 또한 '통치행위'로 인정받은 판례는 남북정상회담 개최,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 군사시설보호구역 변경(이상 대법원), 자이툰부대 파병, 대통령의 사면권(이상 헌법재판소)뿐이다. 외교 행위와 무관한 강제동원 판결은 통치행위에 해당되지 않는다.
일본 정부의 식민지배 합법 주장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는 식민 지배의 미화를 넘어 그 자체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한국이 자발적으로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일본과 ‘합방’했고 서구 식민 지배와 달리 교육과 경제발전이 이루어졌다는 점을 들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제국주의 시대부터 일본 여론을 주도해 왔던 일본 신문기사에도 잘 드러난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외지' 용어가 급증하더니 1935년 이후에는 '식민지' 용어가 점차 사라졌다. 최근에도 종종 식민 지배 자체를 부정하는 발언이 나오고 있는 배경이다.
세대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웃 국가인 일본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발전시키자는 데 반대할 한국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일본이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고 진정으로 사죄하며 일본군위안부 및 강제동원피해자에게 보·배상하는 것이 최선의 해결책이 될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시민사회가 이를 실현하기 위해 활동하는 이유다. 하지만 한일 양국 사이에는 여러 현안이 있기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 과거사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해서 다른 현안에 대한 협력을 늦출 수는 없다.
문제는 윤석열 정부의 대일 자세에 있다. 윤석열 정부는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명확히 한 대법원의 판결이 갖는 의의를 폄훼하고 일본의 선의에 기대하는 안이한 외교적 자세를 보였다. 그런 점에서 대일 외교는 게도 잃고, 구럭도 잃었다. 대법원판결이 당장 한일관계를 어렵게 하는 측면이 있더라도 그것은 다른 차원에서 해결할 일이지 역사 바로 세우기를 중단할 일은 결코 아니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 대일 외교의 과오를 거울삼아 한일관계의 새판짜기에 나서야 할 것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