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 절도, 그리고 ‘좋은 삶’에 대한 상상력(2)
그래서 선거 때가 오면 늘 ‘동일 노동, 동일 임금’ 요구나 ‘새로운 고용 창출’ 등의 요구가 장맛비처럼 쏟아지곤 한다. 하지만 이런 요구들 역시, 설사 그것이 요구처럼 비교적 잘 실현된다 하더라도 ‘노동력 상품화’를 전제로 하는 이 사회경제 시스템, 즉 자본주의의 본질적 문제를 넘어서진 못한다. 오히려 그럴수록 ‘시스템과의 동일시’가 강화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삶의 위기는 여전히 극복되지 못하고 도리어 심화한다. 도대체 무엇이 근본 문제인가? 앞에서 ‘노동력 상품화’가 문제라 했는데, 이는 결코 돈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 핵심은 삶이고 관계다. 삶이란, 나아가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약 80년 내외를 사는 이 인생, 그 출발점은 아가의 탄생이다. 부모의 사랑(‘조건 없는 사랑’)을 듬뿍 받으며 건강하게 자라 또 부모의 사랑 속에 부모로부터 독립해 살아간다. 그리고 삶의 동반자를 만나 다시 아가를 낳고 기르며 산다. 그렇게 50대, 60대를 보내고 나면 손주들이 생겨 사랑을 베풀다 인생을 마감한다. 이게 ‘좋은 삶’이다. 여기서 문제는 식의주 같은 일상을 어떻게 영위하는가다. 보통은 약 20년에서 30년 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취업한 뒤에 30-40년 간 노동력 상품을 팔아 그 돈으로 상품을 사서 해결한다. 그 와중에 집이나 땅, 주식과 비트코인 등 상품이 재산 증식 수단이 되기도 한다. 즉, 우리가 한 평생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 원리가 노동력 상품화라는 ‘사회적 관계’에 기초해 있다. 인격체의 일부분인 노동력이 상품이 된다는 것,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상품은 사물이므로, 인간에게 저항할 수 없다. 만일 상품이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인간은 폭력을 사용할 수도 있다.”(고병권, <자본 강의>, 149-150쪽). 결국, 우리가 노동력을 상품화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스스로 자본의 명령 아래 복종하며 산다는 뜻이다. 겉으로는 자유, 평등, 우애를 외치지만, 실상은 복종, 차별, 경쟁이 우리 삶을 장악한다. 이게 자본주의다. 만일 이 노동력 상품화 없이 마을마다 지역마다 소규모 공동체가 전통적인 ‘두레와 품앗이’ 원리로 삶의 문제를 ‘함께’ 해결한다면 어떨까? 풀벌레도, 곤충도, 이름 모를 들풀도 사람처럼 살아갈 권리를 향유한다면? 그리하여 비록 일인당 국민소득 같은 숫자로 된 경제발전, 경제성장 집착이 아니라 사람들이 느끼는 ‘관계의 충만함’에서 오는 행복감으로 삶이 영위된다면? 정부가 꼭 필요하다면, 대외적으로 전쟁 예방과 평화 관계 유지는 물론, 나라 전체적으로 필요한 물자(식량, 학교, 병원, 요양원 등)의 수급을 적절히 조정하고, 그것이 골고루 배분되게 신경 쓰는 그런 일을 해야 한다. 이렇게 지금의 자본주의와는 전혀 ‘다르게’ 살아갈 수 있다는 상상력이 지금의 우리들에게는 부재한 게 아닐까? 바로 이 상상력의 부재는 크게 두 차원에 근거할 것이다. 하나는 우리가 자본주의 경제성장에 집단적으로 ‘중독’돼 있다는 것! 눈만 뜨면, 돈(소득, 대출, 부채, 이자), 고용, 신상품, 매출액, 수출, 세계 몇 위, 시세차익, 외환보유고, 미국 연준, 달러 환율 등등, 자본의 가치(value) 범주들이 우리를 휘감는다. 화폐나 상품이 인간 삶을 장악해버린 물신주의(fetishism)! 우리가 어릴 적부터 배운 모든 개념과 관계들이 죄다 ‘자본의 품안’에서 놀기에,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본의 가치(value) 범주에 중독된 채 산다. 노동력 가치 평가(evaluation)를 잘 받기 위해 초중고 시절은 물론, 대학생 시절까지 성적에 집착한다. 취업 이후 퇴직까지 우리는 ‘가치 있는’(valuable) 존재로 평가받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래야 화폐나 상품을 마음껏 소유, 소비하며 살 수 있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 그러니 어찌 ‘다른’ 삶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다른 하나는, 독일 브레멘대 홀거 하이데 교수가 지적하는 바, 오늘날 우리 대다수가 ‘포스트-트라우마 사회’에 살고 있어, 의식적으로 인지하건 못하건 대부분 ‘집단 두려움’에 갇혀 있다는 것! 하이데 교수가 <중독의 시대>에서 긴 논의를 펼친 바 있지만, 간략히 설명하면 이렇다. 우리는(조상들은) 이미 수백 년 전에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을 거부한다는 것은 곧 죽음임을 집단적으로 경험한 바 있다. 중세 말기 이후 농민 봉기와 수공업자 저항 등을 통해 자유와 해방을 누리려던 사람들, 나아가 토지를 박탈당한 사람들이 공장 노동을 거부하고 떠돌다 국가와 자본의 폭력 앞에 무참히 패배하거나 죽임을 당한 역사가 그 증거다. 그것도 한두 차례가 아니라, 수없이 반복된 패배의 역사! 저항과 패배의 반복! 그리고 여러 겹으로 누적된 트라우마(상처)! 그 패배의 끝에는 교육, 훈련, 이념, 훈계, 기계, 제도를 통한 (자본주의 시스템 속으로의) 순치 과정이 이어졌다. 이렇게 우리는 체불 임금에서 임금 절도로, 임금 불평등에서 노동력 상품화로, 자본주의에서 비자본주의로,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는 지평을 부단히 넓혀 나아가야 한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