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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 공포증 먹고 사는 한국의 보수주의(1)

박근혜 정권 시절 대구에서 택시를 탔을 때의 일이다. 중년 나이쯤의 택시 기사가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에 대한 불평불만을 장황하게 늘어놓더니 뜬금없이 "그래서 박근혜 대통령이 잘돼야 한다"라면서 말을 마쳤다. 본인의 사회적 처지나 상황에 불만을 지니고 있지만, 부자를 대변하는 박근혜 정권을 지지하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다. 극소수 기득권층이 아닌 절대다수의 국민은 세상이 바뀌어야만 생활고와 같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고 더 행복해질 수 있다. 만일 이들이 모두 자기 이익을 기준으로 합리적으로 사고, 판단한다면 보수정당이 아닌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정당을 지지할 것이다. 그러면 한국에서 극우 보수정당은 발을 붙이기 어렵게 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상당수의 국민, 특히 상당수 가난하고 못 배우고 힘없는 서민들이 본인한테 해만 되는 부자 정당을 지지한다. 이 때문에 한국의 보수 성향 국민 비율이 과거엔 절반을 훌쩍 넘겼고, 지금도 30~50% 정도를 차지한다.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들이 부자들을 대변하는 보수정당을 지지하면서 그 정당에 투표하는 것을 흔히 '계급 배반 투표'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왜 계급 배반 심리를 갖게 되며 계급 배반 투표를 하게 되는 것일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사람은 대부분 인간에 대한 경제주의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다고 여긴다. 즉 인간이란 자기한테 이익이 되는지, 손해가 되는지를 꼼꼼히 따져보고는 자기한테 이익이 되는 쪽을 선택하는 합리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기본적으로 옳다. 사람들은 '악조건이 없는 한' 손익관계 혹은 이해관계에 기초해 자기한테 이익이 되는 쪽을 선택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만일 한국 사회에 특별한 악조건이 없다면 절대 다수 국민은 자기한테 이익은 커녕 해만 끼치는 극우 보수정당을 절대로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에는 합리적인 사고나 판단에 기초한 이념의 선택과 수용을 방해하는 '악조건들'이 많다는 데 있다.
본인에게 해로운 이념을 선택, 수용하며 나아가 지지하게 만드는 악조건 중 첫손에 꼽을 수 있는 것은 '공포'. 어떤 마을을 지배하는 험악한 깡패가 '내가 이 마을의 왕이니까 내 말에 무조건 복종하라!'고 요구한다고 가정해 보자.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억지인 줄은 알지만, 깡패가 너무 무서운 나머지 굴복하여 그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이념의 선택과 수용에 미치는 공포의 위력이다.
공포가 이념의 선택과 수용에 미치는 강력한 영향력을 언급한 선구적인 심리학자는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그는 유명한 오이디푸스 이론을 통해 원래 아들은 어머니를 사랑하고 아버지는 증오하지만 거세 공포로 인해 결국에는 아버지의 가치관을 받아들이게 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아들을 국민, 어머니를 진보, 아버지를 보수로 대치해보면 그의 이론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국민(아들)은 자기한테 이익이 되는 진보(어머니)를 사랑하고 지지하며 또 그래야 마땅하지만, 보수(아버지)에 대한 공포로 인해 보수 이념(아버지의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지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성욕설은 명백한 오류이므로 성적인 내용을 배제한다면 오이디푸스 이론의 핵심은 '공포로 인해 적(아버지)의 이념을 수용한다'는 문장으로 압축할 수 있다.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도 공포가 이념의 선택이나 수용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류 역사에서 인간이 허구를 실제로, 환상을 진리로 잘못 인식한 것은 바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폭력 때문이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기 때문이다. 폭력이야말로 인간이 자주성을 지킬 수 없게 만들며, 그로써 인간의 이성과 감성은 왜곡된다." 그의 말대로 폭력 이 폭력에는 단지 물리적인 폭력만이 아닌 정신적인 폭력도 포함됨 - 에 대한 공포는 이념, 지식, 정보 등의 선택과 수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일반적으로 극소수 기득권층은 세상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에 보수 이념을 지지한다. 그들의 보수 이념 선택은 자기한테 이익이 되는 이념을 선택하는 것이므로 전적으로 합리적 행위이다. 이렇게 계급적 이익에 근거해 보수 이념을 선택하고 지지하는 보수를 '합리적 보수'라고 한다. 원칙적으로 절대다수의 국민은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기 때문에 진보 이념을 선택하고 지지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극우 보수 세력에 대한 공포가 심한 경우 상당수의 사람은 공포에 짓눌려 자기한테 손해일지라도 보수 이념을 선택하고 받아들인다. 이들의 이념 선택은 자기 이익에 반하는 것을 선택한 것 여기에서는 공포를 방어하는 것도 이익으로 간주하는 견해는 일단 논외로 한다 - 이므로 전적으로 비합리적 행위이다. 이렇게 공포로 인해 자신의 계급적 이익에 반해 보수를 선택하고 지지하는 보수를 '비합리적 보수'라고 한다. 합리적 보수는 계급적 이익이나 기득권을 배타적으로 고수하다가는 자본주의 체제가 붕괴하거나 혁명이 발생할 것 같다고 느끼면 큰 폭의 양보를 할 수 있다. 불평등이 심각한 미국에서 일부 자본가가 정부를 향해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거두라고 요구하거나 기본소득제를 도입을 주장하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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