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자는 일생 동안 지혜로운 이를 섬긴다 할지라도 결코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이는 마치 국자가 국 맛을 모르는 것과 같다. 愚人盡形壽, 承事明知人. 亦不知眞法, 如杓斟酌食. 『법구경(法句經)』의 「우암품(愚闇品)」에 나오는 말이다. 지구의 나이는 45억 년이고, 우주의 나이는 대략 140억 년이다. ‘우주(宇宙)’라 할 때 ‘우(宇)’는 위, 아래와 사방[上下四方曰: 宇] 즉 공간(Space)의 개념을 말하는 것이고, ‘주(宙)’는 예로부터 지금까지[往古來今曰: 宙] 즉 시간(Time)의 개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주는 시공간 복합체의 개념이다. 현대 과학이 밝혀낸 우주의 나이를 구약 성서에는 고작 6천 년이라 주장한다. 6천 년인 줄 알았던 우주의 나이가 140억 년이나 된다는 것, 종별 창조가 아니라 종의 점진적 분화가 있었다는 것, 우주는 지금도 팽창하고 있으며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 남자와 여자의 갈비뼈가 동수라는 것 등은 이제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이 과학이 증명해 낸 사실이다. 구약의 야훼와 등장인물들이 느혜미야가 만든 고대 근동지역 설화의 각색이었다면, 신약 복음서의 예수는 거의 대개가 로마교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스라엘의 예수는 착취와 수탈로 비참한 삶을 살던 갈릴리 동포의 고통에 대한 분노로 로마의 패권에 저항하다 십자가에서 죽은 민족주의자였다. 이것을 종교적 신으로 만든 것이, 바울이 창안한 기독론이다. 이 또한, 성경에 관련된 메소포타미아 문명사와 로마사에 대한 문헌학과 서지학 그리고 고고학 등의 역사와 기록이 밝혀낸 사실이다. 예수를 믿는 이유가 ‘구원받고 천국 가기 위해서’라면 그런 인생은 이 땅에서의 희망이 없다. 예수를 믿음으로써 자신은 천국 가는 ‘안심보험’에 들어놓았다고 생각하는 인생이라면 그 사람은 결코 세상을 변화시킬 수가 없다. 대체로 이런 종교인들은 예수 믿고 복 받아 잘 사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 된 사람들이다. 부를 이루어 성공하는 것이 축복의 증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세속적 욕망에 사로잡혀서 권력 지향적이고 이기적 인생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종교인은 세속적 성공과 믿음의 등가가 비례하는 것으로 믿는 기복주의자들이다. 순복음의 조용기는 “예수 믿은 지 3년이 됐어도 복을 못 받은 사람들은 그 믿음을 의심해 봐야 한다.”라고 설교하였다. ‘양복 입은 무당’이라는 말이 거저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의 십자가 공로로 대속적 구원을 약속받았다고 굳게 믿으며 ‘영혼 구원’이라는 편협한 이원론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종교인들은 예수를 기복의 수단으로만 삼을 뿐, 예수의 삶과 희생에는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한다. 예수의 정신은 내세의 보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거듭남에 있다. ‘영혼의 구원’보다는 ‘생명의 회복’이 우선되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부패한 가장 큰 이유는 영혼의 거듭남이라는 생명의 회복 없이 영혼 구원이라는 보장성보험에만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죽은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 죽음으로서 모범을 보인 것이다. 이탈리아산 ‘안심보험’ 은 파산된 지가 오래되어 이미 전 세계적 웃음거리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번지수를 잘못 짚고 신통력 있는 부적을 찾아 헤매는 것이 대한민국 교회의 현실이다. 국자가 천년의 세월 동안 국물에 담겨 있어도 국 맛을 모르듯, 어리석은 인간은 천년을 살아도 참다운 진리의 뜻을 모른다. 국자가 닳도록 국을 푼들 국자가 어찌 국 맛을 알겠는가? 평생 예수를 믿는다면서 예수의 삶과 정신을 외면한 채, 현세의 축복과 내세의 구원이라는 보장성 보험에만 눈이 먼 사람들은 일생 동안 열심히 교회를 다닌다고 하여도 부지런히 교회의 마당만 밟았을 뿐이다. 이 땅에서의 삶의 변화와 생명의 회복이 없다면 종교 동호회로서의 친목을 위한 소속 신분과 연대에만 관심을 쏟는 외식주의자에 불과하다. 일식과 월식에 대한 메카니즘의 이해가 부족했던 시대에 기후의 변화를 신의 징벌로 이해했던 것처럼, 21세기에 나이가 40이 되어서도 여전히 산타를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인생은 매우 불행한 사람이다. 사랑은 사랑한다고 말할 때까지 사랑이 아니다. 어떤 형태로든 구체화 되어야 한다.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것은 욕망이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구체적 실천이 있을 때 비로소 사랑이라는 단어에 의미와 가치가 있게 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삶의 평가는 그의 실천적 삶의 행위에 있는 것이지, 지적인 동의와 행위 없는 믿음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굶주린 사람의 몫이다. ‘이미 다 알고 있다’라거나 ‘내가 틀릴 리가 없다’라는 확신에 찬 고집이나 아집에 빠진 사람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이다. 책 한 권 읽고 세상의 모든 이치를 다 안다고 하는 사람처럼 어리석고 위험한 인생은 없다. 진리란 자신의 사고를 절대시하지 않는 사람의 몫이다. 언제라도 자신의 믿음과 신념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겸허히 살아가는 사람에게만 발견되는 가치인 것이다. 무식한 도깨비가 부적을 모르듯 국자는 국 맛을 모르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