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나쁜 일이 발생했을 때 초기에 잘 대처해서 더 이상 문제가 커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아예 처음부터 나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보다는 못하다. 나쁜 일이 발생하리라는 것도 모르고, 발생하면 허둥대다가 시기를 놓치고, 드디어 손을 놓아버리는 아주 한심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나라 다스리는 왕(王)에 대입해 보면, 내우외환을 미리 대처하거나 벌어진 사태를 슬기롭게 해결하는 현군(賢君), 자신이 일을 저질러놓고도 그 결과로 어떤 나쁜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암군(暗君), 사태 파악 못하고 허둥대기만 하는 혼군(昏君), 화를 내며 책임을 주변이나 아래로 떠넘기는 폭군(暴君)이 있을 법하다. 조선 역사를 보면, 현군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아도 남을 만큼 적었고, 암군과 폭군이 득실거린 바람에 한 번도 국운을 제대로 펴보지 못한 채 시나브로 망해갔던 것이다. 다행히 해방과 함께 채택된 민주주의 덕분에, 적어도 한반도 남쪽에 살고 있는 한민족의 절반은 더 이상 왕조시대와 같은 폭군과 암군의 횡포를 겪지 않게 됐다. 물론 우리 역사 속에서 우리 스스로 피를 흘려가며 쟁취한 민주주의가 아니어서, 폭군 못지않은 독재자들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그들도 왕처럼 죽을 때까지 권좌에 있지는 못했다. (이 대목에서 굳이 박정희 경우를 예외랍시고 꺼낼 필요는 없겠다.) 민주주의를 이루는 여러 제도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으로 중요한 제도가 선거라는 것을 이번 4.10 총선에서 다시 한번 절감했다. 막강한 검찰권력을 등에 업고 오른손에 거부권, 왼손에 시행령을 흔들어 대면서 (겉으로 보기에) 철옹성 같았던 윤석열 정권에 균열을 내고 사정없이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3년은 길다”며 몸서리치는 국민에게는 범야권 192석이란 압도적 결과마저 불만족스러웠지만, 불과 며칠 만에 급전직하한 국정지지도 여론조사 결과와 뒤섞여 대통령실과 여당을 갈팡질팡 아노미 상태에 몰아넣고 있다. 내각과 대통령실, 여당 지휘부 등을 대대적으로 개편하겠다고 허둥지둥 나섰지만, 열흘 넘어 총리와 비서실장 후보를 찾지 못해 쩔쩔매는 모습이 안쓰러울 지경이다. 이런 저런 사람들이 하마평에 오르고는 있지만 다 그 밥에 그 나물이다. 원래 보수 쪽에 제대로 된 인물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윤 대통령의 국정운영 방식을 보면, 도대체 누가 선뜻 “내가 총리를 맡아 국정 난맥을 바로잡겠소” “내가 비서실장을 맡아 대통령을 충심으로 보좌하겠소” 나서겠는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누가 그런 막중한 역할을 맡는다 한들, 혼자서 59분을 떠들어댄다는 대통령 앞에서 소신 있게 할 말을 하면서 내각과 대통령 비서실을 제대로 이끌어 갈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더구나 지금은 V1이니 V2니, 용산 세 간신이니 네 간신이니, 대통령실의 명령계통이 송두리째 무너진 양상을 보이지 않은가. 그러니 난국에 빠진 윤 정권을 구해내겠다는 결기와 능력을 가진 인물보다는 잿밥에 더 관심있는 B급 C급 인사들이나 침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순식간에 민심의 홍수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윤 대통령이 결국 죽어도 하기 싫어했던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의 영수회담까지 제안하고 나섰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윤석열차가 궤도를 이탈해 잘못된 길로 질주한 지 너무 오래됐고, 지금은 도저히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진 상태기 때문이다. ‘이채양명주’와 ‘김건희 도이치 모터스’ ‘대장동 50억 클럽’ 특검법과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대한 거부권 행사가 윤석열차 궤도 이탈과 폭주의 명백한 증거들이다. 곧 본격적으로 제기될 ‘채 상병 사건 수사 외압’에 대한 특검법 역시 그러하다. 사람들은 영수회담이 열릴 경우 민생을 최우선 의제에 올려줄 것을 기대하고 있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하지만, 윤 대통령이 진심으로 민생을 염두에 두고 영수회담을 제안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 기대야말로 연목구어이며 삼척동자가 웃을 농담일 것이다. 지금 윤 대통령에게는 민생이 문제가 아니라 이재명 대표가 자신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줄 수 있을지, 적어도 영수회담이 위기 탈출의 방법을 궁리할 시간을 벌어줄 수 있을지, 온통 그것만이 절실할 것이다. 반면 이재명 대표는 영수회담 기회를 이용해 ‘민생을 챙기는 야당 지도자’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번 영수회담이 끝내 열리지 못하거나, 열리더라도 아무 성과 없이 끝날 것이라고 예상하는 이유는 바로 그 지점, 윤 대통령과 이 대표의 처지가 너무나 확연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윤 대통령은 이 대표가 받아들이지 못할 요구를 할 것이며, 이 대표는 윤 대통령이 받아들여야 마땅하지만 (지금까지 늘 그래왔던 것처럼) 받아들이기를 거부할 요구를 할 것이다. 아주 낮은 수준에서 총리 인준 등 내각 구성에 협조를 요청한다 한들, 앞으로 국정운영을 어떤 식으로 확 바꾸겠다는 약속과 함께 그에 걸맞은 인물을 내세우든가, 추천을 부탁하든가 해야 하는데 윤 대통령이 지금까지 보여 온 행태를 보면 티끌만큼이라도 그 가능성을 찾을 수가 없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