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국제박람회기구(BIE) 누리집을 살펴보니, 이들 12개국 중 룩셈부르크를 뺀 11개국이 모두 국제박람회기구 회원국이면서 한국의 공관이 없는 나라들입니다. 룩셈부르크도 회원국은 아니지만 한국의 박람회 유치 행사에 총리를 비롯한 고위 관리가 자주 얼굴을 내민 것으로 봐, 엑스포 유치 활동과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그냥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있을까요. 공관 설치 약속을 미끼로 부산에 찬성표를 던져 달라고 물밑 거래를 했다면 보통 일이 아닙니다. 국제적으로는 ‘매수 행위’이고, 국내적으로는 국고의 낭비입니다. 공관 하나를 추가로 설치하고 운영하려면, 공관과 공관장 관저, 직원 인건비를 포함해 아무리 작은 공관이라도 한 해에 수십억 원은 족히 들어갑니다. 지금도 외교부는 세계 곳곳에 모두 188개 공관을 유지·운영하고 있습니다. 차제에 12개를 더 늘려 200개를 채워 ‘공관 수 분야 금메달’을 딸 요량인 줄 모르겠지만, 지금도 적은 인원에 많은 공관을 운영하느라 질 높은 외교를 할 수 없다는 불만이 내부에서 터져 나오는 실정입니다. 또 외교부는 엑스포 유치 결정 일주일 정도를 앞두고는 국제박람회기구 회원국 공관장들에게 투표 때까지 교섭에 활용하라면서, ‘부산세계박람회 판세 메시지 송부’라는 제목의 비밀전문을 보냈습니다. 공관장에게 마지막까지 유치에 힘쓰라고 독려하는 것이야 무슨 문제겠습니까마는 그 내용이 자못 충격적입니다. ‘본부의 판세 분석에 따르면, 사우디가 120표 이상을 얻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고 1차 투표에서 약간의 표 차가 있을 수 있으나 한국이 2차 투표에서 이를 만회하고도 남을 표를 확보하고 있다’라는 내용입니다. 특히, 대다수 국가도 2차 투표에서 유치국이 결정된다고 보고 있고 1차 투표에서 사우디를 지지했던 나라들도 2차에서는 태도를 바꿔 한국을 지지하기로 했다고 전했습니다. 투표 결과가 보여줬듯이, 모두 거짓된 내용입니다. 외교부가 정말 그렇게 판단했다면 정보 수집 및 판단력이 제로였다는 걸 확인해 주는 것입니다. 이런 판세가 거짓임을 알고도 비밀전문을 공관장에게 발송했다면 더 문제입니다. 한국 외교의 최일선에서 일하고 있는 공관장을 바보로 만든 처사니까요. 이 전문은 재외 공관장, 외교부 본부의 장관, 1차관, 2차관, 경제조정관, 차관보 등 주요 간부뿐 아니라, 대통령실의 미래전략관실과 국가안보실까지 공유됐습니다. 이제까지는 외교부가 실상을 알고 있었으나 대통령실의 벽에 막혀 제대로 보고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정설처럼 돼 있었지만, 이 전문은 외교부도 한 배에 타고 있었다는 걸 말해 줍니다. 물론 외교부 자체 판세 분석은 달랐는데 대통령실에서 내려온 모종의 압력에 굴복해 이런 거짓 내용의 전문을 보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더욱 더 진상을 파헤쳐야겠지요. 3대 참사 중에서, 윤 대통령이 직접 국민 앞에 나와 사과를 한 것은 부산 엑스포 참사가 유일합니다. 윤 대통령은 유치 실패가 결정된 당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부산 시민뿐 아니라 우리 전 국민의 열망을 담아 민관 합동으로, 범정부적으로 2030년 부산 엑스포 유치를 추진했지만 실패했다”라면서 “이 모든 것은 전부 저의 부족”이라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이상한 건, 윤 대통령의 이례적인 사과에도 불구하고 후속 문책 인사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채 상병 사망 수사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 전부 승진 또는 우대를 받았듯이, 부산 엑스포 참사의 주역들도 모두 후대를 받았습니다. 외교 수장이었던 박진 외교부 장관은 총선에서 서대문을 후보로 단수 공천됐고, 외교부 안에서 실무 책임을 맡았던 오영주 제2차관은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으로 승진·발탁됐습니다. 대통령실에서 호가호위하며 부산 엑스포 유치를 총지휘했던 장성민 미래전략기획관도 문책은 커녕 총선에서 안산갑 후보로, 전략 공천됐습니다. 엑스포 유치 활동을 한답시고 총리 역사상 가장 빈번하게 ‘해외순방 놀이’를 즐겼던 한덕수 총리도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다가 총선 패배 뒤에야 사임 의사를 밝혔습니다. 대통령이 사과했는데도 실무자들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것은, 대통령실과 실무자들의 생각이 똑같았다는 것 말고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더욱 더 외부의 감시와 견제, 추궁과 신상필벌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제22대 총선은 윤석열 정권의 내치뿐 아니라 외정도 준엄하게 심판했습니다. 이런 결과에 따라 탄생할 새 국회는 방향을 잘못 잡은 채 헤매고 있는 한국 외교를 바로잡을 책임도 지고 있습니다. 청문회를 하든, 국정조사를 하든, 더욱 강한 다른 무엇을 하든, 그것을 위한 첫걸음은 부산 엑스포 참사의 원인과 과정을 파헤치고 따져 묻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