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핵발전소 내 사용후핵연료 임시저장조가 가득 차면서 원전 가동중단 위협이 현실화되고 있다. 현재 추진하는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특별법’(고준위 법)은 원전 부지 내 건식 저장시설을 구축하여 원전 가동중단 사태를 막고, 영구 처분시설을 위한 법을 만들려는 것이다. 21대 국회에서 여야 국회의원들이 4개 법안을 대표 발의했고 최근 언론에서는 21대 국회에서 이 법을 통과시켜야 한다는 기사들이 연일 쏟아지고 있다. 사용후핵연료는 재처리 등을 통해 재활용할 수 있으므로 자원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어서 원자력안전법 35조 4항에 따라 원자력진흥위원회에서 폐기하기로 해야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이 된다. 우리나라는 핵 비확산금지조약에 가입되어 있어서 재처리할 수가 없지만, 이를 염두에 두고 사용후핵연료를 고준위 폐기물로 결정한 적이 없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부지 내 저장공간을 늘리기 위한 건식 저장시설 구축을 위하여 고준위법을 제정하는 것은 ‘고준위법’으로 사용후핵연료를 다루겠다는 것이므로 적절하지 않다. 먼저 사용후핵연료가 폐기물인지 아닌지 여부를 가려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고준위법을 제정하겠다는 것은 방폐장을 이유로 소내 저장공간을 법으로 강제해 늘리려는 심산으로 비칠 수 있다. 고준위법의 주요 골자는 고준위 방폐물 전담조직을 새로 만들어 부지 내 저장시설에 대한 의견수렴 절차, 부지 내 저장에 따른 원전 지역 지원에 관한 사항, 고준위 관리사업자 지정 등이다. 얼핏 보면 의견수렴을 위해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절차를 마련한 것 같지만, 그 절차를 관료적으로 집행하고 지역 지원금을 무기로 주민들을 위협하는 경우, 강압적인 추진으로 격한 갈등을 일으키는 매우 위험한 법 절차로 이어질 수 있다. 법으로 주민 수용성을 확보한다는 발상 자체가 주민 수용성을 신뢰가 아닌 법으로 확보한다는 것이므로 법 제정 방향부터 틀렸다. 경주 방폐장 사례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1980년대부터 처분장 부지 확보를 시도했지만 9차례의 부지선정에 실패한 뒤 결정한 곳이 현재의 경주 방폐장 부지이다. 1조 5000억 원을 들여 지하에 동굴을 팠지만, 지하수가 하루 1300t이 들어와서 매일 펌프로 퍼내고 있다. 이 배수설비는 60년만 고려해서 이후 물에 잠겨도 대책이 없다. 생각보다 많은 바닷물이 지하수로 들어오지만 해수용 콘크리트를 사용하지 않아서 속수무책이라는 원자력안전기술원장의 고백이 2016년 국감장에서 권칠승 의원의 질의에 대한 답변으로 나왔다. 중저준위 핵폐기물만 수용한다지만 최종 마감 후 시간이 흘러 지하수가 방사능에 오염되면 방사능은 경주, 울산뿐 아니라 언제, 어디로 어떻게 지하에서 흘러 다닐지 아무도 모른다. 추가로 해당 지역은 지진 단층대에 가까운 지역으로 2016년 경주지진처럼 언제든지 지진의 위협이 상존한 지역이다. 경주 방폐장 유치 당시 고준위 반입을 주민들이 반대하지 않았으면 어쨌을까 하는 아찔한 생각이 든다. 더욱이, 이미 처분된 1만 2000드럼은 핵종 분석 오류로 핵종이 얼마인지 파악도 안 되고 있어 전부 다시 끄집어 내어 분석오류를 수정해야 하지만, 정부 당국은 쉬쉬하고 은폐하고 있다. 이러한 심각한 문제는 국정조사로 언제든 다시 밝혀내어 수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경주 방폐장은 위치의 선정, 건설, 운영 모든 면에서 실패한 방폐장이다. 1조 5000억 원이 투입된 동굴은 처분장으로 적합하지 않다. 이미 처분된 폐기물은 지하수 오염을 피하기 위해 전부 파내어 표층, 매립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러한 오류는 다시는 반복되면 안 되며, 특히 고준위 방폐장의 경우 더욱 그렇다. 졸속은 또 다른 졸속을 부르는 것인가? 지금처럼 법을 만들어 관료적으로 강제하는 식으로 긴급하게 집행하는 정부의 졸속 추진 방식은 신뢰받을 수 없다. 사용후핵연료 건식저장을 위한 토목공사와 저장 용기, 운반 용기 제작이라는 수십조 원의 대형사업이 원자력계의 희망사업으로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현 정부와 국회에서 이 달콤한 사업을 관철하기 위해 국민적 신뢰 없이 무리하게 고준위법을 통과시켜 주민지원금을 무기로 소내 저장고를 강제 추진한다면 또 다른 국민적 혼란과 갈등 상황이 벌어질 것임은 누구라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원자력계는 이러한 고준위법을 추진함에 있어 숨기고 속이려고만 하지 말고 먼저 국민적 신뢰부터 얻어야 한다. 당대에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오로지 시간만이 해결할 수 있는, 그것도 10만 년이 걸릴지 20만 년이 걸릴지 모르는 핵폐기물을 무작정 생산하는 일은 그만둘 때가 되었다는 불편한 진실을 이제는 받아들여야 한다. 잠깐 사용하는 전력 생산을 위해 영구적인 핵폐기물을 생산하는 것은 누가 봐도 난센스다. 그래서 수명연장이다. 신규건설이다 하고 자꾸 일을 벌이며 목전의 이익에 충실히 하는 사업보다, 지금은 장기적으로 국민안전을 염두에 두고 핵폐기물 처분에 더욱 책임감 있고 진솔한 소통 모습부터 보여야 한다. 그래서 국민적 신뢰가 쌓일 때, 그때부터 문제해결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