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초중고 도서관에서 국민세금으로 산 어린이책이 무더기로 폐기되고 있다. 중국 진시황이 벌인 끔찍한 분서갱유(책을 불태우고 선비를 땅에 묻음)의 역사가 2300년 만에 한국에서 아주 작은 버전으로 되살아난 듯하다. 경기도지역 초중고만 해도 최근 1년간 모두 2528권의 어린이책을 폐기했다. 최근 경기도교육청이 국회 교육위 강민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보낸 ‘성교육 도서 폐기 현황’을 살펴본 결과다. 폐기한 이유는 우익 학부모단체와 종교단체 등이 특정 책들을 콕 찍어 학교에 ‘폐기 종용’ 문서를 보내는 방식으로 압박했기 때문이다. 이 책들은 대부분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성교육 관련 도서다. 올해 2월 경기도교육청은 한 술 더 떠 ‘성교육 도서 처리 결과 도서목록’ 제출을 지시하는 공문을 학교에 요구했다. 교육청이 우익 단체 폐기 요구에 박자를 맞추고 나선 것이다. 우익단체들은 “학교도서관에 비치된 문제의 성교육 도서들이 음란한 삽화, 동성애 조장과 선정적 내용을 담고 있어 아이들에게 위험하다”는 이유를 대고 있다. 정말 그럴까? 우익 단체들이 폐기를 요구한 책 가운데엔 도서출판 ‘이마주’가 낸 ‘줄리의 그림자’란 책도 있다. 경기도 지역 4개 초등학교는 실제로 이 책을 폐기했다. ‘줄리의 그림자’를 일부러 사서 읽어봤다. 이 책은 프랑스 작가 크리스티앙 브뤼엘이 쓰고 안 보즐렉이 그림을 그린 유명한 창작 그림책이다. 책장을 넘기면서 화가 치밀었다. 헛웃음도 나왔다. 왜 그랬냐고? 우익단체들이 얘기하는 ‘음란한 삽화와 선정적 내용’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줄리라는 여자아이는 얼굴을 꾸미지 않아 부모에게 야단맞기 일쑤다. “그 꼴로 어디를 가려고?” “머리를 더 단정하게 빗어.” “이런 선머슴 같은 녀석!”이라는 식으로… 어느 사이엔가 줄리는 남자아이 모양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바로 자기의 모습인 것이다. “저리 가! 나는 여자야”라고 외치며 깊은 고민에 빠진다. 어느 날 줄리는 산책을 나가 비슷한 고민을 가진 친구를 만난다. 둘은 서로 대화하며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얻는다. “사람들은 여자아이는 여자아이 같아야 하고, 남자아이는 남자아이 같아야 한다고 말해. 각자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권리는 없어.” “맞아 오이피클처럼 말이야. 여자 오이피클은 여자 오이피클 병에, 남자 오이피클은 남자 오이피클 병에 넣다가 남자 반 여자 반 오이피클은 어디에 넣을지 몰라서 우왕좌왕하는 거지. 나는 한 사람이 여자 같을 수도 있고, 남자 같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꼭 한 가지 이름표를 붙여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 우리에게는 우리다울 권리가 있어.” 이렇게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아이들을 다룬 내용이 누구에게는 ‘동성애 조장’으로 보인 모양이다. 황당한 일이다. 행복을 찾아 나서는 줄리의 모습을 누가 욕할 수 있는 것인가? 내가 보기엔 이 책은 정말로 건전할뿐더러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찬사도 나왔으리라. “머리카락 빗는 것도 목욕하는 것도 싫어하는 소녀 줄리. 엄마 아빠는 선머슴처럼 행동한다며 줄리를 야단친다. 어느 날 줄리는 공원에서 한 소년을 만난다...(이 어린이책은) 세상이 정한 방식과 편견에 맞서 자신을 드러내도 괜찮다고 말해준다. 남들과 다른 점 때문에 고민하는 아이에게 살포시 건네고 싶다.” 이런 찬사 글을 쓴 곳은 바로 보수신문 동아일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 책을 낸 ‘이마주’란 출판사의 정체를 알았기 때문이다. 이 출판사는 ㈜조선교육문화미디어(구 조선에듀케이션) 소속 브랜드다. 조선교육문화미디어는 ‘조선에듀’ 섹션을 담당하며 출판사업까지 벌이는 조선일보 자회사다. 결국 우익단체 옹호기사를 많이 써온 조선일보에서 낸 책을 우익단체가 공격하고 나선 셈이다. 우익단체가 문제 삼은 조선일보 책은 이 뿐만이 아니다. 우익단체들은 최근 법정기구인 간행물윤리위원회에 어린이, 청소년 성교육 도서 68권에 대해 ‘유해 간행물로 지정해 달라’는 심의를 요청했다. 이들이 요청한 책 가운데에는 조선교육문화미디어 소속 ‘이마주’ 출판이 낸 ‘사춘기 내 몸 사용설명서’도 들어있다. 간행물윤리위는 지난 4월 5일 해당 책에 대해 ‘문제가 없다’고 판정했다. 우익단체가 신청한 68권의 책 가운데 1권을 뺀 나머지 67권에 대해서도 ‘유해간행물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정했다. 그런데 이런 책들을 다른 곳도 아닌 학교에서 태워버린 것이다. 간행물윤리위라는 법정기구에서도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지만, 우익 단체 요구에 따른 것이다. ‘동성애 조장’이라는 헛소리 으름장에 학교까지도 무릎 꿇은 꼴이다 우리는 지금 붉은 완장을 차고 쇠몽둥이를 든 사람들을 보고 있다. 이 사람들은 학교를 상대로 ‘학생 임신 조장 반대’ ‘동성애 조장 반대’ 등의 구호를 외치며 책 폐기 으름장을 놓고 있다. 이를 말려야 할 경기도교육청은 오히려 이들에게 동조하고 나섰고, 정부는 사실상 방관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들에게 간행물윤리위의 판단은 한갓 종이쪼가리일 뿐인 듯하다. 반이성, 반문화, 반교육이 판치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 ‘줄리의 그림자’ 책 속에 나오는 줄리가 살고 있다면, 그는 정말 한 평생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