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사회에서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말은 절대적으로 옳다. 주권자의 일원으로서 사람은 모두가 평등해야 하며 돈이나 지위, 그리고 권력의 유무에 따라 차별받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특히 법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다.' 하지만 성품이나 인격에서도 차등이 없지는 않다. 시민 대부분은 그저 선량한 사람들이다. 그중 아주 극소수 훌륭한 분들도 있지만, '영리한 놈' '얍삽한 놈' '멍청한 놈' '비겁한 놈' '사나운 놈'이 적지 않다. 이들을 조심하지 않으면 평범한 우리의 삶은 큰 낭패를 보기 마련이다. 영화 '석양의 무법자'의 원래 제목처럼 '좋은 놈, 나쁜 놈, 추잡한 놈'을 끊임없이 따져 가며, 누구와는 가깝게 지내고 누구는 가능한 멀리하는 것이 어쩌면 그다지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우리 보통 사람의 세상살이 지혜일 터이다. 하기야 나쁜 놈들은 나쁜 놈들끼리만 가깝게 어울리며 더 나쁜 짓을 꾸미는 것이 세상의 이치라지만 말이다. 하지만 법정의 판사는 그런 구별도 해서는 안 된다. 오로지 피고인의 피의사실만 앞에 놓고 증거와 증언만으로 유무죄를 따져야지, 피고인이 돈이 많으냐(유전) 권력자냐(유권)를 염두에 두어서는 안 되는 것은 물론 피고인이 좋은 놈이냐 나쁜 놈이냐는 선입견을 지녀서도 안 된다. '죄가 밉지, 사람이 미운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들 하는데, 자칫 사람을 미워하다가 죄 없는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죄를 지을 수도 있으니 그렇다. 흔히 '법정은 신성한 곳'이라고 한다. 하도 이상한 판결이 많이 나와 원성이 자자해지자 법조인들, 특히 판사들이 그런 소리를 한다. 오래전 양승태 전 대법원장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실 판사들만 그런 주장을 하는 게 아니라 실제 그렇게 믿는 일반인도 꽤 있다. 그런 믿음은 결국 '불멸의 신성가족'이란 해괴한 단어로까지 이어진다. 대한민국에서는 판사 검사 변호사까지, 법을 다루는 '법조 삼륜'이 서로서로 도우며 영원히 망하지 않는 신성한 가족공동체를 이룬다는 뜻이다. 이런 신성가족들이 인간 세상에 강림하셔서 죄짓고 벌벌 떠는 인간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법정이야말로 신성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죄지은 적 없고 죄지을 일도 없는 평범한 시민들의 눈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법정은 인간들이 지은 죄를 인간들이 기소하고 인간들이 판결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곳일 뿐이다. 판사나 검사나, 변호인이나 피고인이나, 법정 정리나 방청객까지도, 간밤에 친구들과 술 한 잔 마시고, 늦잠 자고, 아침에 억지로 일어나 화장실 가고 밥 먹고, 부랴부랴 가방 챙겨 출근한 똑같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 법정이라는 말이다. 신이 강림할 리는 없지만, 재판에 관여하는 사람들, 심지어 멀리서 지켜보는 사람들도 "신이었어도 저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받아들일 만한 판결을 기대하는 것은 맞다. 성서에는 신이 내린 판결마저도 억울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수두룩한데, 인간이 내린 판결에 대해 불만과 억울함이 생기는 건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런 판결이 어수룩하고 뒤틀리기까지 한다면 피고인은 절대 승복하지 않을 것이며, 법에 대한 신뢰는 무너지고 사회정의가 송두리째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판결은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어도 최대한 객관적이어야 하며 절차에서 공정하고 논리가 분명해 최대한 많은 이해당사자를 납득시켜야 한다. 판사가 어떻게 그것을 담보하느냐 하는 중차대한 문제에 대해 헌법에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제5장 제103조)라는 느슨한 규정밖에 없다. 여기에서 핵심은 '양심'이다. 헌법과 법률은 모든 판사의 머릿속에 똑같은 문장으로 입력돼 있고, 증거나 증인들도 검사와 변호인들이 요구한 대로 똑같이 법정에 제출돼 있다. 그중 어떤 증거를 채택할 것이냐, 어떤 증언을 더 신뢰할 것이냐, 법조문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여부는 온전히 재판관의 선택, 즉 그의 양심에 달려있다. 심하게 말하자면 '엿장수 마음대로'다. 판사의 양심은 어떻게 분류될 수 있을까? 크게 세 부류라고 난 본다. 첫째, 처음 판사 선서를 했을 때처럼 어려운 이웃을 돕고 사회정의를 위해 헌신할 의지를 여전히 간직한 양심. 둘째, 판사의 특권을 내면화해 잘 먹고 잘사는 것을 목표로 하는 직업인으로서의 양심. 셋째, 오로지 일신의 영달과 부귀영화를 더 하고자 아예 수구 기득권 세력에게 저당 잡힌 양심. 사람들은 비슷비슷한 사안들에 대해서 법원의 입장이 서로 다르거나 바뀔 때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개탄한다. 특히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서 더욱 그렇다. 자신의 입장과 동일한 판결을 하면 그게 바로 상식이라며 손뼉을 치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정의가 무너졌다고 분노한다. 지난 금요일(7일) 이화영 대북 송금 혐의에 대해 9년 6개월 실형을 때린 신진우 부장판사의 판결을 접하며 많은 민주·진보 시민들이 느꼈을 감정이 바로 그랬을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