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교육과 독자 학문 없는 주변부 국가 한국(1)
나는 27년 간의 교수 생활을 마치고 이제 한 사람의 시민, 연구자로 돌아간다. 대학에서 강의한 기간을 합하면 30년이 넘는다. 학부부터 박사학위 이수까지 17년 정도를 보냈으니, 그 기간 동안의 교사, 군 복무, 재야 연구자 생활 등을 빼더라도 40년 이상 대학에서 보냈다. 『시험능력주의』라는 책 서문에서도 썼지만, 나는 한국에서 제일 큰 대학에서 학생 시절을 보냈고, 서울에서 가장 작은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했기 때문에 한국 대학과 고등교육, 학문사회, 학벌. 학력주의의 문제점을 가장 날카롭게 느꼈다. 청년 때부터 한국 학문의 독자성과 진보성을 제창했기 때문에 미국 유학 보수파가 주류인 사회과학계에서 거의 주변적 존재로 겨우 살아남았다, 올해도 어김없이 한국의 중요 대학들이 여러 외국의 대학평가에서 몇 등인지를 알리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곧 국내 신문사도 국내 대학평가에 기초해서 대학 서열의 변동을 보도할 것이다. 나는 이런 대학 순위가 한국 고등교육의 질이나 학문 발전과는 거의 무관하다고 본다. 한국의 대학은 분명히 과거 개발독재 시기에 비한다면 교육 내실도 크게 향상되었고, 교수들의 연구 업적도 크게 향상되었다. 국제 수준의 학회에서 한국 학자들의 역할도 두드러지고, 특정 분야의 수준은 세계적인 반열에 오르기도 했고, 또 그런 세계적 반열에 오른 학자들을 보유한 대학도 있다. 그러나 내가 현장에서 보고 느끼는 한국 대학의 일반적인 현실은 매우 참담하다. 사립대학의 파행, 특히 각종 사학비리는 70년째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는데, 교육부는 이런 문제에 손을 놓고 있으며, 교수들은 거의 논문 생산기계가 되었으며, 비정규직 교수의 처지는 처참하고, 학문적 재능이 있는 젊은이들은 로스쿨로 가고, 과거나 현재나 학생들은 입학 이후 학문보다는 취업준비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 중 내가 가장 심각하게 보는 것은 미국과 유럽의 대학과 달리 한국의 대학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학부 중심 대학, 즉 학벌 간판을 발급하는 곳 이상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대학 서열은 학문이나 교육의 수준과는 거의 무관하고, 졸업장 간판을 중시하는 학생, 학부모들은 대학 교육의 질에 관심이 없다. 이 ‘업계’에 있는 우리들은 다 알고 있는 일이지만, 서울대나 상위권 대학의 인문사회계 박사과정은 이미 오래전부터 공동화되어 있다. ‘학력 세탁’을 위해 이들 대학의 박사과정에 진학하는 타 대학 출신들도 있지만, 학문적 열정을 가진 자기 대학 학부 출신자들은 거의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캠퍼스에 번듯한 건물이 올라가고, 수능성적이 최고로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오고, 교수들은 열심히 논문을 생산하니, 대학은 잘 굴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 보면 인문사회계 학생들의 상당수는 로스쿨을 준비하고, 공대 자연계 학생들은 반수를 해서 의대 진학을 하려 한다. 학문은 공적인 것인데, 과거나 현재나 한국에서 대학과 학문은 거의 지위와 돈을 얻기 위한 수단이다. 명문대 간판을 얻기 위해 아이들은 일주일 내내 밤늦게까지 학교와 학원을 전전해야 하고, 학부모들은 27조 원의 학비를 학원과 과외 공부에 지출한다. 과연 로스쿨과 의대 진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다수인 인문사회계와 자연계 기초학문 학과나 과목을 계속 유지할 필요가 있을까? 왜 그런 학생들을 위해 국민의 세금으로 서울대 학부를 유지해야 할까? 이론물리학의 국가적 석학이 한국 대학에서 퇴임하고 연구할 곳이 없어서 중국으로 간다고 한다. 중국은 한국 퇴임 교수들에게 상당한 연봉을 제안하면서 이들 우수한 학자들을 끌어들인다. 과연 중국은 이런 비용을 거저 지출할까? 이필호 기초과학학회 협의체 회장은 "최근 발생한 연구비 삭감, 2028년 수능 개편안, 의대 증원 등은 기초과학 교육과 연구 생태계의 저변을 뒤흔드는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기초과학 분야에 우수한 인재가 없으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앞으로도 한국 기업들은 반도체, 조선, 자동차 산업이 지금까지 수준의 기술력만으로 버틸 수 있을까? 로스쿨과 의대가 한국을 먹여 살릴까? 성형외과나 피부과가 세계 첨단이니 의료산업에 한국의 미래가 있나? 각종 사회갈등, 저출생과 자살, 수도권 집중 등 사회붕괴 현상 모두 최고로 우수한 변호사와 판검사들이 해결할 수 있나? 법학과 의학은 세상의 미래를 밝히고 그것에 어떻게 대처할 것을 가르쳐주는 학문이 아니다. 법학은 갈등을 처리하는 학문이지 사회 갈등의 확산을 막는 데는 답을 줄 수 없으며, 의학은 병이 생긴 후에 치료를 학문이지 병을 생기지 않도록 하는 학문이 아니다. 이 두 학문 역시 철학 사회학 심리학 정신과학 화학 물리학 생물학의 기초가 없이는 존립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이 두 학문은 응용학문이며, 그 상당 부분은 당장의 문제해결에 사용되는 ‘기술’이다. 그런데 이 수준 높은 ‘스킬’을 익히기 위해 그 사회의 가장 우수한 청년들이 몰려든다면, 사회와 경제의 토대는 누가 만들어 낼 것이며, 그 토대 구축에 필요한 설계, 그리고 원리를 탐구하는 기초학문은 어디서 만들어질 수 있을까?<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