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교육과 독자 학문 없는 주변부 국가 한국(2)
과연 선진국은 수십 년 아니 수백 년 동안 축적한 자신의 기초과학 지식, 그것에 기초한 최첨단의 기술을 후발국에게 무상으로 이전해 주나? 그리고 선진국의 지식 인프라는 세계화 시대에 인류의 공유자산으로 존재하는가? 한국 기업들은 그런 최첨단의 기초과학 기술과 그것을 가진 과학자들을 그냥 구입하거나 초빙할 수 있나? 왜 미국 정부는 이런 몇 제약회사의 백신 개발에 그렇게 많은 예산을 지출했나? K-문화, K-영화, 한류의 세계화가 있지 않으냐고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학문보다는 문화가 한국의 경쟁력인 점도 맞다. 그런데 문화산업이 어느 정도의 고용을 창출할 수 있으며, 문화산업이 국가 경제의 근간을 지탱해 줄 수 있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 투자하고 키워야 한다 핵물리학처럼 전쟁 수행을 위한 첨단 무기개발에 필요한 지식은 언제나 국가의 것이었으며, 기업의 판매 시장은 온 세계이지만, 그 생산품의 부가기치를 높이는 핵심 기술은 언제나 국가가 막대한 투자를 해서 개발한 것이지 단기적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 스스로 개발한 경우가 거의 없다. 학문은 모든 것의 인프라이며, 그 위에서 기술개발도 교육도 언론도 영화산업도 가능하다. 그래서 대학과 학문은 공적인 것이며, 학자는 공적인 자산이다. 당장의 효용이 없는 기초학문에 열정을 가진 사람은 국가와 사회가 잘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 여기서 제국을 경영했던 국가와 식민지였던 국가 간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과거 일제 강점기 일본이 조선에 고등교육 기관을 설립하지 않으려 했던 것처럼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에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지 않았던 이유는 분명하다. 식민지 백성들에게는 원리를 탐구하는 기본지식이 필요 없으며, 그들에게는 먹을거리만 던져주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차별의 장벽을 뚫고 제국주의 본국의 대학에 진학한 식민지 엘리트들은 제국주의 통치의 하수인 역할을 충실하게 했다. 1945년 이후 신생 독립국들은 모두 대학을 설립하여 국가운영에 필요한 엘리트를 육성하려 했다. 그 후 70년 이상이 지난 세계 지식의 생산과 재생산, 엘리트 생산과 재생산의 판도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제 제국주의, 냉전 시대는 지났다. 과연 2차 대전 후 독립국은 지식의 생산과 유통에서도 자주성과 독자성을 확보했을까? 『궁정전투의 국제화』를 쓴 이브 드잘레이, 브라이언트 가스는 남미의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혁에서 미국 시카고학파의 지배를 드러낸다. 90년대 이후 남미 각 나라의 경제정책은 모두 시카고 대학 동문들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고발한다. 미국 유명대학 동문들이 각국 대표로 다보스 포럼이나 OECD 차원의 각종 경제회의에서 거의 유사한 정책적 대안을 내놓기 때문에, 세계 지식생태계를 지배하는 그들은 국적은 다르지만 시장 자본주의 외의 모든 정책적 대안이 등장하는 것을 막으면서 국제 금융자본의 활동을 지원한다. 전 세계 모든 신생 독립국처럼 한국에서도 한국전쟁 후 수 많은 대학이 설립되었고, 그 중 몇 분야는 상당한 수준에 올라서게 되었다. 그러나 남미 국가들처럼 한국의 대학과 학문도 미국유학파들의 시험장의 기능을 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자본주의 시대의 ‘신학’으로 불리는 경제학이 그렇다. 전원이 미국 박사인 서울대 경제학과는 학생들에게 어떤 교재로 무엇을 가르치고 있을까? 개발독재 시기 경제발전의 이론 정책적 기반의 역할을 충실히 한 한국개발연구원의 연구위원급 박사 58명 중 54명은 미국 박사이며, 4명은 영국 등 기타 지역 출신이고 한국 박사는 한 명도 없다. 그런데 개발독재 시기를 벗어난 지도 한참 지난 지금 미국의 최신 경제학 이론으로 무장한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자들은 한국 경제에 무슨 대안을 제공해 주고 있을까? 왜 한국의 최상위권 대학에 경제학과가 있어야 할까? 경제학자들은 경제학과가 경영학과에 밀린다고 한탄하기 전에 이 점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이 필수적인 문학, 역사 등 일부 인문학에서만 국내 대학의 박사 학위가 여전히 경쟁력을 갖겠지만 그것도 지금처럼 이들 대학의 박사과정이 공동화되면, 그 우위가 무너지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다. 아마 이렇게 10년이 지나면 아마 문학 철학 역사 등 인문학도 영어로 쓴 논문이 국내 논문을 압도할 것이며, 외국에서 수학한 학자들이 한국의 교수 자리를 다 차지할지 모른다. 그 때가 되면 한국의 정부나 기업이 필요로 하는 기초 기술, 사회가 필요로 하는 현실 분석과 정책 처방은 모두 인공지능(AI)에 맡기고, 대학의 사망선고를 선포하자는 주장이 지금보다 더 힘을 얻을지 모른다. 이것이 ‘주변부’ 국가의 아주 작은 대학에서 겨우 밥을 먹으면서 평생 학문활동을 해온 내가 본 지금 한국의 대학, 학문의 모습이다. 제대로 된 학문공동체도 만들지 못하고,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학문적 성과도 내지 못한 채 교수직에서 물러가는 한 ‘원주민 학자’의 넋두리다. 학문은 보편성을 갖고 있으나, 대학은 국적성을 갖는다. 국가의 체계적이고 정밀한 대학정책과 학문 정책이 없고, 예산이 고등교육에 제대로 투여되지 않는 것은 고위 관료나 정치세력이 국가의 미래에 대한 고민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