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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술에 빠진 사람들(2)

13세기 말에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한반도에 들어왔을 때 원나라 군대의 주둔지였으며, 임오군란 때 조선에 들어온 청나라 군대가 같은 곳에 주둔했으며,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 군대가 바로 그 자리에 들어섰다가, 일본 패망 후 미군이 대신 들어서서 지금까지 나가지 않고 버티고 있는 곳이다. 말하자면 외국군이 한반도를 침략하면 반드시 장악해야 할 지정학적 적소였던 곳이다. 일제는 그곳에 사령부와 병참기지 및 조선총독부 관사를 두었다.
나는 한미연합사가 창설되던 해에 그곳에서 군생활을 했다. 매일 남의 나라 깃발이 내걸린 연병장을 오가며 식민지의 비애를 곱씹곤 했다. 그날, 한미연합사 창설 당일 나는 수백 개의 별들이 모여있는 행사장 외곽에서 권총을 차고 경호업무를 해야 했다. 윤석열은 이런 역사를 알고 갔을까? 그는 왕이 되기 위해 용산으로 갔지만 실은 점령군이나 식민지 본국의 총독으로 그 자리를 찾아간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주술과 장소와 인물이 어우러져 블랙코미디 같은 정치극이 벌어지고 있다. (: 한미연합사는 20221115일 평택 미군기지로 이전 완료했다. 그날 기념행사 축사에서 윤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전 장병은 라캐머라 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팀(One Team)이 되어 한미동맹의 심장인 연합사가 더욱 활기차게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 주길 당부드린다." 사령부가 이전했다고 해서 미군이 아주 철수한 것은 아니다. 사령부의 핵심 인력이 여전히 용산에 남아 있을 것이고, 주한 미대사관도 가까운 장래에 그 언저리로 이사 올 계획이다.)
주술에 빠진 대통령을 탄핵하자는 국민청원이 2주도 채 안 되어 130만 명을 넘었다. 기록적인 수치. 하지만 별다른 상황변화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정상적인 정치인이라면 제정신이 아닐텐데 윤석열은 무척 태평스럽게 보인다. 이미 이런 일을 예상하고 주술적으로 대처해놨기 때문이다. 스승이, 오방신이 지켜주시는데 무슨 걱정이 있으랴!
그러나 그 주술적 대처가 과연 효과가 있을지 어떨지를 떠나 탄핵을 바라보는 국민 전체가 대통령 부부보다 더 심각한 주술에 빠져있는 것이 진짜 문제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경제성장이라는 주술이다. 경제성장 주술에 한 번 빠지면 백이면 백 출구를 찾지 못하고 주저앉는다. 윤 정권이 당선 이후 줄기차게 외치는 부자 감세규제 혁파는 경제성장 주술에 빠진 이들을 달래는 조처이다. 대통령과 함께 국정을 운영하는 이들은 법적으로 치명적 하자가 없이 경제성장 주술을 적당히 읊조리는 것만으로 정권 유지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면 어찌하여 경제성장에 대한 믿음이 주술인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경제성장이라는 신념은 주술의 요건을 완벽히 갖추고 있다. 주술은 주술사와 신자, 주문(呪文), 주구(呪具), 주술 행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술사는 스티브 잡스나 일론 머스크 같은 기업체 총수이고 신자는 고객들이다. 이들이 온갖 광고를 통해 주문(呪文)을 외우면 고객들은 해당 상품을 주문(注文)한다. 주구는 상품 유통과 관련된 모든 설비와 장치를 말하며, 주술 행위는 판매 촉진을 위한 각종 이벤트나 판매행위를 뜻한다. 이 과정이 원활히 진행되면 경제성장이 이루어지고 이는 곧 고객의 행복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주술의 내용이다.
경제성장 주술이 현대인을 사로잡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주술에도 계보와 역사가 있다. 이 주술은 처음부터 주술로 개발된 것이 아니었다. 처음엔 특정 계급의 사람들이 자신의 상업활동을 가로막는 구체제를 타파하기 위해 갖은 무도한 짓을 벌이다가 점차 힘을 얻게 되자, 용하다는 주술사들이 사방에서 나타나 정교한 신념체계와 주술행위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대표적 경제학자인 아담 스미스는 이기심이야말로 인간의 행복 실현을 위해 신()이 내려준 국부의 원동력이라고 갈파함으로써 단순한 성장 이론을 주술로 격상시켰다. 사람들은 하찮아 보이는 개인의 상업활동이 주문만 잘 외면 어마어마한 부를 모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야말로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모은 재산으로 권력까지 장악한 다음 국경을 넘어 무자비한 부의 사냥에 나섰다. 이 주술의 특징은 나의 이익만 잘 챙기면 보이지 않는 신()이 나머지는 알아서 처리해 줄 것이란 믿음이다. 가난에 지친 민초들에게는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이다. 당장에 사람들은 오랜 세월 자신의 행동을 옭죄고 있던 종교를 걷어차고 이 새로운 주술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주술은 종교처럼 복잡한 의식이나 규정, 교리, 사제 계급 같은 것이 없다. 좋아하는 주술사의 말만 믿고 자기 이익에 충실하면 그만이다. 경제는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주술은 거의 기성 종교를 대체할 지경에 이르렀다. 한국의 경우 주술사 박정희, 이병철, 정주영 등은 죽어서 신이 되었고 이들을 따르는 신자들이 한국 보수정치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민주화운동 경력을 내세우는 민주당이 아무리 다수 의석을 차지해도 한국사회의 보수적 기조는 변하지 않는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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