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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병, 엘리트 병, 망국병(1)

1997년 겨울은 나라 안팎의 한국 사람들에게 매우 혹독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날씨가 다른 해보다 더 추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돈 가뭄 탓에 생고생했던 기억은 선명합니다. 그때 저는 <한겨레> 기자 신분으로, 일본의 한 대학에서 연수를 하고 있었습니다.
시 한국에는 이른바 아이엠에프(IMF) 사태로 불리는 금융위기가 터졌고, 그로 인한 쓰나미가 일본에 있는 한국 유학생들까지 덮쳤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환율 탓에 한국에서 송금받는 돈으로는 학업은 커녕 생활하기조차 힘든 상황에 몰렸습니다. 한 언론재단으로부터 엔화 기준으로 지원금을 받았던 저는 그나마 형편이 나았지만, 집에서 보내주는 돈으로 생활해야 했던 주위의 많은 유학생들은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한국 학생들로 북적대던 어학교실은 금세 썰렁한 공간으로 변했습니다. 나라 경제가 망하면 그 나라 국민이 얼마나 비루해지는가를 온몸으로 경험했습니다.
한국처럼 국가 부도사태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일본도 금융위기를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일본의 4대 증권회사 중 하나였던 야마이치증권의 파산입니다. 야마이치증권은 부동산 거품 붕괴의 여파로 생긴 부실채권 폭증을 견디지 못하고 창업한 지 100년 만인 1997년 스스로 문을 닫았습니다. 그해 1124, 폐업을 알리는 기자회견에 나선 노자와 쇼헤이 사장은 90도 인사와 함께 사원들은 죄가 없습니다. 제 책임입니다. 제발 그들이 길거리를 헤매지 않게 해주십시오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저도 텔레비전을 통해 그 회견을 보면서 울컥했습니다. 노자와 사장의 눈물 회견은 지금도 1997년 일본을 강타했던 금융위기를 상징하는 극적인 장면으로 소환되곤 합니다.
하지만 노자와 사장의 눈물 호소에도 불구하고 7500명에 이르는 사원 전원이 실직했고, 이들은 각자도생을 위해 몸부림을 쳤습니다. 이때 제가 일본 잡지에서 읽었던 기사가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명문 증권사답게 이 회사에는 일본 최고 명문대인 도쿄대 출신이 많았습니다. 그런 도쿄대 출신의 실직자들이 재취업을 하려고 당시 일본에 진출해 있던 외국계 증권사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외국계 회사의 인사 담당자는 면접 때 그들에게 당신은 무슨 일을 잘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을 잘한다는 얘기는 전혀 하지 않은 채 나는 도쿄대 출신이라는 점만 되풀이 강조했습니다. 출신보다 능력을 중시하는 외국계 회사는 당연히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내용의 기사를 읽으면서, 저는 도쿄대 병, 엘리트 병이 야마이치증권을 망하게 하고 더 나아가 일본 경제를 망친 주범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문을 가졌었습니다.
최근 한국 국회에서 벌어진 일을 보면서 문득 야마이치증권 도쿄대 출신 직원들의 엘리트 병이 떠올랐습니다. 아니 도쿄대 병보다 더욱 심한 서울대 병을 목도했습니다. 바로 625일 열린 국회 법사위 회의에서 정청래 위원장의 의사진행 방식에 항의하는 유상범 의원에게 정 위원장이 국회법 공부 좀 하고 오세요라고 한 데 대해 유 의원이 공부는 내가 더 잘했다라고 대응한 장면입니다. 대다수 미디어가 정 법사위원장과 유 국민의힘 법사위 간사가 조롱과 야유 섞인 설전을 벌였다며, 양비론 관점에서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시각의 보도에 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
두 의원의 상호 언쟁 중에 나온 발언은 분명하지만, 도긴개긴의 공방 보도로 넘어가기엔 유 의원의 말이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유 의원이 구체적인 학교 이름까지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그 말속에 서울법대 출신(유 의원)이 비서울대 출신(정 위원장)보다 만능이고 우월하다는 오만한 엘리트 의식이 깔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울법대 나온 유 의원이 건국대 공대 나온 정 위원장보다 국회법도 잘 아는지는 국회법 자격시험이 없으니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서울법대라는 간판을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재단하는 서울대 병 중환자라는 건 확실히 드러났습니다. 서울법대 출신 아니면 다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깔보는 사람이, 과연 비서울대 출신이 거의 99.99%를 차지하고 있는 일반 유권자를 위해 어떤 마음과 자세로 의정활동을 하고 있을지 심히 궁금합니다.
이왕 엘리트 병 얘기가 나왔으니, 또 하나 지나칠 수 없는 사례가 떠오릅니다. 지난 22대 총선 유세 때,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수원병에 출마한 이수정 경기대 교수의 지지를 호소하면서 불쑥 내뱉은 말입니다. 한 위원장은 이수정은 여기서 이러지 않아도 얼마든지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이다. 이수정이 여러분을 위해서 나왔다라고 말했습니다. 재산도 많고 좋은 직업도 가지고 있는데 굳이 안 해도 될 희생을 하며 가엾은 유권자들을 위해 출마했으니 그를 찍어주지 않으면 여러분이 손해라는 뜻입니다.<계속>
 
 
본 칼럼은 시민언론 민들레에 기 게재된 내용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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