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도 윤 기자는 그 모든 것을 대통령의 공영방송 장악 행위가 아니라 민주당으로 편향된 공영방송을 중립적이고 독립적인 방송으로 되돌려 놓으려는 시도로 여기는 듯하다. “MBC는 민주당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당은 MBC를 사수하려고 인사청문회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방통위원장을 줄줄이 탄핵한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기사를 그렇게 썼을 리 없다. 나는 윤 기자의 생각과 판단을 ‘이해’한다. ‘오해’하지 마시라. 찬성하거나 공감한다는 게 아니다. 윤 기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나름대로 파악했다는 말이다. 윤 기자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러려고 이 칼럼을 쓰는 게 아니다. 비평의 자유는 헌법이 만인에게 준 권리다. 언론사에서 봉급을 받는 기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윤 기자와 마찬가지로 나도 그 권리를 행사할 뿐이다. 내가 보기에 윤 기자는 충직하고 성실한 직장인이다. 회사의 방침과 상급자의 뜻을 잘 알고 존중하면서 열심히 취재하고 기사를 쓴다. 특별히 비난할 이유가 없다. <중앙일보> 대주주와 경영진과 정치부장을 비롯한 간부들은 <중앙일보>를 중립 언론으로 여긴다. 정치적 중립을 포함한 ‘저널리즘 규범’을 준수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윤 기자의 관점과 기사 작성 능력을 높게 평가할 것이다. 괜히 하는 말이 아니다. 윤지원 기자의 기사를 살피다가 정치부장이 누구인지 궁금해져서 찾아보니 최민우 기자였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칼럼을 쓴다. <최민우의 시시각각>이다. 노종면 의원을 자극했던 윤 기자의 기사가 나간 다음날 새벽 0시 41분, <중앙일보>는 다음 뉴스 포털에 <최민우의 시시각각> 칼럼을 올렸다. ‘편파적일수록 정당하다는 뇌구조’라는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이진숙 후보자의 뇌구조가 이상하다고 한 최민희 과방위원장을 비꼰 줄 알았다. 나를 겨냥한 제목이라고는 상상하지 않았다. 최민우 기자는 칼럼에서 청문회 증인들을 모욕하고 상임위원회를 멋대로 운영했다는 이유를 들어 최민희 국회 과방위원장을 비판했다. 최재영 증인의 대통령 부인에 대한 성희롱 발언을 부추겼다고 정청래 법사위원장을 꾸짖었다. 그런데 그들보다 더 심한 사례로 나를 도마에 올렸다. 나는 국회의원도 아닌데 왜? 아마도 최근 언론을 세게 비판한 것이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것 같다. 그는 이렇게 썼다. “궤변과 거짓을 일삼던 유시민이 MBC <손석희의 질문들>에서 언론이 편파적인 게 문제가 아니라 편파적이지 않아서 문제라며 ‘우리 편으로 안 오면 재미없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문장을 이어 붙였지만 취지는 그대로다. 의심스럽다면 칼럼을 검색해 보시기 바란다. 나는 최민우 기자를 몰랐다. <중앙일보> 정치부장으로 기명 칼럼을 연재한다는 것도 이번에 알았다. 서운하게 여기지 마시라. <중앙일보> 정치부장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는가? 나는 <중앙일보> 정치부장이 최민우 기자라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하지만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정치부장 이름을 여전히 모른다. 앞으로도 모르고 살면 좋겠다. 최 기자가 최근에 쓴 칼럼을 보면서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중앙일보>와 자기 자신이 정치적으로 중립이라고 믿는 듯하다. 윤석열 대통령이 공영방송을 장악하려 한다거나 언론을 탄압한다는 비판에 동의하지 않는다. MBC가 ‘중립이라는 언론의 미덕’을 팽개치고 민주당과 한패가 되었다고 본다. 그런 확신을 토대로 여러 현안에 대한 칼럼을 썼다. 원래 생각이 그런지, 대주주와 경영진한테 잘 보이려고 그러는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최 기자의 칼럼을 읽으면서 나는 <손석희의 질문들>과 <그의 운명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생각> 3장에서 소위 ‘레거시 미디어’ 또는 ‘재벌언론·족벌언론·건설사언론’에 대해서 했던 말이 타당하다고 새삼 생각했다. 세 가지만 이야기하겠다. 첫째, 오늘날 한국의 언론인은 사회의 엘리트가 아니다. 최민우 기자는 내가 언론에 대해서 한 주장의 근거와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저널리즘이 무엇인지, 20세기 저널리즘 규범이 왜 생겼는지, 그 규범이 뉴미디어 시대에 어떤 한계를 드러냈는지, 한국 언론이 그 규범을 지키는지, 왜 지키지 않는지, 신문사와 방송사 외부에서 이루어지는 ‘유튜브 저널리즘’ 활동이 어떻게 사회의 공론을 활성화하는지 이야기했다. 설마하니 내가 “언론이 편파적인 게 문제가 아니라 편파적이지 않아서 문제”라는 식의 얼토당토않은 말을 했겠는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조사 연구하지 않고 제멋대로 왜곡해서 비평하는 기자를 엘리트라고 할 수는 없다. 논리학에서는 이런 행위를 ‘허수아비 논증’이라고 한다. 그는 내 견해를 비평한 게 아니라 자신이 만든 허수아비를 무딘 칼로 내리쳤을 뿐이다.<계속> 본 칼럼은 시민언론 민들레에 기 게재된 내용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