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청 생명표에 따르면 한국의 신생아 기대여명은 84년 정도다. 최근 태어난 남자아이는 평균 80년, 여자아이는 평균 88년 살 전망이다. 편의상 간단히 ‘평균수명’이라고 하자.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백 년 전의 두 배가 되었다. 옛날에는 운이 아주 좋아야 늙어서 죽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운이 매우 나빠야 늙기 전에 죽는다.(이 글에서 인용한 데이터는 모두 통계청 것이라서 앞으로는 따로 출처를 말하지 않겠다.) 백 년 전까지는 왜 오래 살지 못했나? 주로 전쟁, 전염병, 굶주림 때문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무리를 이루어 사는데, 특이하게도 기회만 생기면 다른 무리를 학살했다. 사람 이외에는 그런 짓을 하는 동물을 보기 어렵다. 전염병은 동물을 길들인 이후부터 주기적으로 찾아들어 신분과 지위를 가리지 않고 사람을 죽였다. 기후 변화나 작물 전염병으로 흉작이 들면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전쟁은 종종 혹독한 전염병과 굶주림을 동반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보면 평균수명이 길어진 게 지극히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1953년 여름 이후 우리는 전쟁을 겪지 않았다. 외부 침략도 없었고 내전도 없었다. 멀리 베트남전쟁에 나갔던 군인들 말고는 누구도 전쟁으로 죽지 않았다. 경제가 발전하고 소득이 올라가면서 국민의 영양상태와 개인위생 수준이 크게 나아졌다. 정부는 강력한 공중보건 정책으로 기생충을 퇴치하고 홍역‧천연두‧결핵‧콜레라 등 오래된 전염병을 억제했으며 코로나19 같은 신종 전염병의 확산을 막았다. 소독약과 항생제에서 CT와 MRI를 비롯한 첨단 진단 장비까지, 약품과 의료 기술이 발전해 어지간한 질병과 상처는 다 치료할 수 있다. 2023년 사망자는 코로나19 사망자가 많았던 전년보다 2만 명 줄어든 35만여 명이었다. 연간 사망자 감소는 일시적 현상이다. 사망자는 해마다 꾸준히 늘어 20년 뒤에는 지금의 두 배가 될 것이다. 사망자의 절반은 80세 넘은 고령자였고, 70대를 합치면 26만 명으로 약 3/4을 차지했다. 사망원인은 대부분 질병이다. 코로나19가 3위였던 2022년을 제외하면 언제나 암, 심장질환, 폐렴, 뇌혈관 질환 등이 리스트 상단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직접 사망원인일 뿐이다. 70세 이상 고령자가 사망자의 3/4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런 질병들은 진짜 사망원인이 아니라 살 만큼 살고 노환으로 세상을 떠날 때 마지막으로 겪은 증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정부의 의대 입학정원 대폭 확대 조처가 ‘의료대란’을 야기했다. 의료대란은 한국인의 평균수명에 영향을 줄까? 준다면 얼마나 줄까? 2024년 2분기 통계를 보면 아직은 대답하기 어렵다. 2분기 사망자는 전년 같은 기간 대비 1.1퍼센트 늘어난 8만 4천여 명이었다. 금년 2월 전공의들이 집단 사직해 대형 병원 응급실과 수술실이 혼란에 빠졌지만 사망자 통계에는 특별한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연말까지 사망자 수와 사망원인 통계를 정밀하게 살펴봐야 근거 있는 평가를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의미를 부여할 만한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으리라 본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와 보건복지부에서 일하던 시기에 읽었던 보고서를 기억한다. 2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세계보건기구(WHO)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고서의 평균수명 관련 내용은 잊지 않았다. 1945년 이후 세계적 규모의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전쟁을 논외로 하면 인류의 평균수명은 세 가지 이유 때문에 늘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영양상태 개선으로 인한 면역력 향상과 전염병 퇴치를 비롯한 공중보건정책 발전이 압도적 요인이었다. 의료 기술 발전과 의료 서비스 공급 확대도 한몫을 했지만 전문가들이 평가한 기여도는 10퍼센트 안팎이었다. 그것만 해도 큰 기여라는 건 분명하지만,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만큼 절대적이지는 않았다. 거꾸로 해석하면 이렇게 된다. ‘의료대란’ 때문에 사람이 많이 죽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불경기로 인한 소득 감소와 국가 보건정책의 퇴행이 더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의료대란’이 우리의 삶과 죽음에 미칠 영향을 논하려면 한 가지 개념을 더 알아둘 필요가 있다. ‘건강수명’이다. 건강수명은 장보기에서 화장실 출입까지 일상 활동과 취미생활을 혼자 힘으로 하면서 살아가는 기간을 가리킨다. 전문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인의 평균건강수명은 평균수명보다 10년 정도 짧다. 한국인은 생애의 마지막 10년 동안 타인의 도움을 받으며 일상생활을 영위한다는 뜻이다. 그 시기의 삶은 ‘퀄리티’가 낮으며 치료와 간병과 요양에 큰 비용이 든다. 재산이 부족할 경우 건강을 잃은 노인은 가족과 사회에 무거운 짐이 된다. 평균건강수명과 평균수명의 격차가 크면 노인 자살이 증가한다. 2023년 1만4천여 명의 한국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0만명 당 25명으로 OECD 회원국 평균의 두 배를 훌쩍 넘겼다. 75세 이상 노인은 10만명 당 70명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계속> 본 칼럼은 시민언론 민들레에 기 게재된 내용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