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의 원수들을 사랑하고,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시오.”(마태복음 5,44) 예수의 이 말씀은 너무나 아름답지만, 악의 세력에 의해 자주 악용되고 있다. 사악한 권력자들을 경호하는 종교 지배층에 의해 잘못 사용되고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제대로 정확히 이해하려면, ‘보복하지 말라’는 계명부터 알아야 한다. 원수를 사랑하려면, 원수에 대해 보복을 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보복 금지를 왜 말했을까. 가해자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는다면, 세상은 악의 세력이 날뛰고야 말 것이다. 가해자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는다면, 공정하고 의로운 사회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직접 보복하러 나선다면,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과도한 보복을 감행할 위험이 없지 않다. 여기서 두 가지 결론이 나온다. 첫째, 가해자는 반드시 처벌받아야 한다. 둘째, 피해자는 가해자를 지나치게 보복하면 안 된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탈출기 21,24-25)는 원칙이 그래서 생겼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눈에 상처를 주었다면, 피해자는 가해자의 눈에 상처를 반드시 주어야 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피해 받은 딱 그만큼만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보복해야 한다.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보복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지나치게 보복하지 말아야 한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보복하지 않겠다고 해서도 안 되고, 피해의 수십 배를 더 갚아주겠다고 나서도 안 된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보복을 겸손하게 기다려야 한다. 하느님은 아무에게나 무조건 자비로운 분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을 해친다면 일곱 배 또는 일흔일곱 배로 보복 받는다는 말씀(창세기 4,24)과 지나친 보복을 금지하는 말씀(탈출기 21,24-25)은 모순 아닌가. 하느님의 두 말씀이 서로 모순이라면, 어느 말씀을 따라야 하는가. 예수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시오”(마태 18,22) 말해버렸다. 하느님 말씀과 예수 말씀이 모순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더구나, 예수는 정당한 보복까지 금지했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마시오.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 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시오.”(마태 5,39) 피해자는 그저 참아내거나 맞아 죽으라는 말인가. 예수는 누구 좋으라고 그런 말을 하는가. 예수는 보복 금지를 말했지 저항 금지를 말한 것은 아니다. 오른뺨을 맞은 뒤 왼뺨마저 돌려 대는 사람은 수동적인 피해자에서 적극적인 저항자로 자신을 변화시켰다. 적극적인 저항자가 된 피해자는 가해자의 횡포에 맞서 인간의 품위를 지켰다. 피해자의 당당한 저항 앞에서 가해자들의 가치와 품위는 끝없이 추락한다. 만일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의 범죄가 있다면, 그것은 보복 금지 대상이 아니고 원수 사랑의 대상도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가 아니라 대통령이고, 김건희 여사는 평범한 이웃집 주부가 아니라 영부인이기 때문이다.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나 평범한 이웃집 주부의 죄는 용서할 수 있어도, 대통령과 영부인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 김건희 여사는 주가 조작 혐의로 재판을 진즉 받았어야 했다. 만일 김건희 여사의 주가 조작 혐의가 엄정한 수사와 재판을 통해 사실로 확인된다면, 김건희 여사는 그 범죄에 상응하는 법적 처벌을 받아야 한다. 만일 김건희 여사의 범죄에 합당한 형량이 징역 20년이라면, 김건희 여사에게 10년이나 5년 징역형을 주어서도 안 되고, 30년이나 50년 징역형을 주어서도 안 된다. ‘내 적과 원수는 매우 많다. 그들이 나를 얼마든지 미워해도 좋다. 나 역시 한 사람도 너그럽게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루쉰 작가는 말했다. 보복을 반대하고 관용을 주장하는 사람을 절대로 가까이 하지 말라고 루쉰은 강조했다. 20대의 체 게바라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어머니, 저는 예수와는 다른 방식으로 싸울 겁니다. 저들이 우리를 십자가에 매달지 못하도록, 저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루쉰과 체 게바라는 값싼 용서를 설교하면서 시민들의 저항 의지에 찬물을 끼얹는 종교 사기꾼들과는 아주 다르다. 종교 사기꾼들은 악의 세력을 어떻게든 도우려고 애쓰고 있지만, 루쉰과 체 게바라는 악의 세력을 처단하려 애쓰고 있다. 종교 사기꾼들보다는 루쉰과 체 게바라가 예수를 훨씬 더 잘 이해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 여기 예수의 모습은 저항하며 울부짖는 민초 속에만 존재한다.”(김규돈 신부) 유시민 작가는 윤석열 정권에게 퇴로를 열어주자고 말하지만.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윤석열 정권에게 조금도 퇴로를 주지 말자고, 나는 말하고 싶다. 원수에게 가장 잔인한 사랑이 원수를 가장 사랑하는 길이다. 사악한 세력은 선하고 자비로운 사람들의 뒤통수를 언제나 노리고 있다. 윤석열 정권은 선하고 의롭고 자비로운 촛불시민의 뒤통수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이 더러운 놈, 괴수야, 마지막 벌을 받는 날이 다가왔으니 네 운명도 끝장이다. 왕관을 벗겨라, 멸하리라, 멸하리라”(에제키엘 21,30-32) 본 칼럼은 시민언론 민들레에 기 게재된 내용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