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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맥락에서 (택배나 포장 등으로 인한) 쓰레기 문제를 사회적 합리성으로 해결할 수도 있다. 박스 테이프나 포장 재료를 자연소재로 만들도록 법제화하거나, 읍면 단위로 재활용센터를 크게 만들어 체계적으로 재활용률을 높이는 것도 좋겠다. 무엇보다, 자연으로 돌아가지 않는 소재를 처음부터 사용하지 못하게 규제함과 동시에 대체물을 개발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와 비슷하게, 지구 열탕화를 저지하기 위한 국가적, 세계적 노력을 전면 강화해야 한다. 6대 온실가스(이산화탄소, 메탄, 아산화질소, 수소불화탄소, 과불화탄소, 육불화황)를 방출하는 모든 사업장과 가정이 더 이상 방출 못하게 ‘비상 대책’이 절박하다. 국회도 나서야 한다.
‘코로나19 팬데믹’과 같은 비상상황에서 잠시나마 푸른 하늘을 다시 볼 수 있었던 기억을 되살려 보시라. “코로나 때 죽었던 ‘경제’를 걱정하라!”는 반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경제’는 왜 하나? 생존과 생활에 도움이 안 되는 경제는 과감히 버려야 산다! 인류의 집단 생존을 위해선 근대 이후 당연시해 온 편리함, 신속함, 있어 보임, 가성비, 이기심 등의 가치 대신 돌봄, 나눔, 아름다움, 버림, 어울림, 자유로움 등의 가치를 공유하고 실천하는 것이 좋겠다. 이 모두, 사회적 합리성을 고양하는 밑거름이다. 그래서 나는 외친다. “조금 먹고 조금 싸자!” 그리하여 “모두 건강하게 살자!”
셋째는 개인적 합리성을 극도로 조심스레 접근하면서도 사회적 합리성이 높은 대안을 찾는 것인데, 앞서 말한 좋은 아이디어를 종합적으로 실천(조화)하면 된다. 흔히, ‘개인의 노력만으로 되겠느냐, 사회가 변해야지…’ 하는데, 이는 반만 옳다. 개인과 사회가 ‘같이’ 변해야 하니까! 물론, 이 둘의 조화를 이루는 가장 좋은 출발점은 자본주의 합리성을 넘어서는 것(탈자본)이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될 일도 아니고 나만 깨친다고 될 일도 아니다. 문제의식을 공유하되 하나씩 깊어져야 한다.
나의 경우, 택배로 오는 박스들은 (테이프를 떼어내고) 납작하게 만들어 텃밭의 풀을 멀칭용으로 덮어주는 식으로 재활용한다. 비가 오거나 오래 되면 박스 종이들이 삭아서 흙으로 돌아간다. 또, 생태화장실에서 나오는 똥오줌을 분리해서 받아 잘 삭힌 뒤 텃밭에 거름으로 쓰는 것도 나의 비법이다. 개인적으로도 물과 전기를 절약해 좋지만, 사회적으로 수질 오염 예방과 흙 생태계 회복에도 좋다. 만일 ‘밥이 똥이 되고, 똥이 밥이 되는’ 이런 모델을 사회 전반적으로 구현할 수 있다면, 개인적 합리성과 사회적 합리성의 조화가 이뤄지지 않을까?
퇴직 이후 나와 아내는 굳이 도시 공간에 살 필요가 없어 읍면 지역으로 이사했다. 삶의 질이 높아 개인적 합리성에 걸맞고, 마음 맞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사니 사회적 합리성도 높아진다. 빗물을 받아 텃밭에 재활용하고, 몇 가지 야채라도 자급하니 기분도 좋다. 지역에서 (돈 안 되는) 인문학 모임은 여럿 하지만, (돈 되는 일이라도) 대중교통이 닿지 않으면 절제하고 포기한다. 얼마 전에 나는 <한겨레>에 ‘기후 산재’의 사례들을 고발하고 성찰하는 칼럼(“기후재앙과 죽음의 행렬”)을 썼는데,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도 ‘폭염노동 방지법’이 통과되었다 한다. 오는 26일 본회의 통과가 예상되는데, 때늦은 감이 있지만 사회적 합리성 차원에서 다행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조치는 8월 말 헌재가 일부 승소 판결을 내린 ‘기후소송’인데, 보다 구체적으로, 2030년 이후에도 온실가스를 대폭 줄이기 위한 범국가적 비상조치를 하는 것이다. ‘고삐 풀린’ 자본주의에 다시 고삐를 채우고 마침내 ‘탈자본’의 길을 열 방법은 없을까? 결코 쉽진 않지만, 이것만이 자본의 합리성을 넘어서는 길, 그리하여 개인적 합리성과 사회적 합리성의 충돌을 넘어서는 길이다. 이는 또한 근대의 계몽 철학이 낳은 ‘도구적 합리성’을 극복하는 것이기도 하다.
흔히 우리는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식의 맹세를 해왔다. 알고 보면 조국도 민족도, 나아가 사회나 세계도, 진심으로 사랑하는 가족이 되면 온갖 문제가 풀린다. 과연 가족이란 무엇인가? 마치 <아빠의 바이올린>에서 성공한 바이올리니스트 마히르가 아내 수나에게 고백하듯, “가족은 서로 다른 음으로 이뤄진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 서로 다른 음들이 조화를 이루려면 “사랑과 보살핌과 헌신과 희생”이 긴요하다. 개인적 합리성과 사회적 합리성의 충돌을 넘어, 사람과 지구가 한 가족으로 사는 길은 진정한 “사랑과 보살핌, 헌신과 희생”을 실천하는 것이다.
작은 고민은 소박한 해결의 시작이다. 더 깊고 체계적인 고민은 더 큰 해결의 문을 연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사회적 책임감에 기초한 민주주의가 더 깊어지고 확장돼야 한다. 이런 고민과 실천의 사회적 축적이 없다면 우리는 본의 아니게 마치 ‘서서히 데워지는 냄비 속 개구리처럼’ 자멸할지 모른다. ‘나부터’ 귀찮음이나 불편함에 대한 감수력을 키우는 일과 동시에, 사회와 지구 전체를 생각하는 ‘성찰적 합리성’(돌봄과 나눔)을 드높이고 실천하는 일이 매 순간 절실하게 느껴진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