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거 없이 하는 말이 아니다. 윤석열은 8월 29일 기자회견에서 자신은 뉴라이트가 뭔지 모른다면서 보훈부 장관이 제청한 대로 독립기념관장을 임명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대통령 직무를 전혀 수행하고 있지 않다는 자백이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독립기념관장 인사만 그렇게 했겠는가. 국정의 모든 분야에서, 모든 인사와 정책 결정을 다 그런 식으로 해 왔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어쩐지 기시감이 들지 않는가? 박근혜 대통령도 그랬다. 대통령이 업무를 수행할 의지와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생긴 권력의 공백을 누가 차지했는가? 김기춘, 우병우, 최순실, 문고리 3인방 등이었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운영 수준은 그런 사람들이 결정했다. 2014년 말 소위 ‘십상시(十常侍) 문건’ 파문이 터졌을 때 권력서열 1위가 최순실, 2위가 최 씨의 남편 정 아무개, 3위가 박근혜라는 말이 떠돌자 사람들은 설마 그렇겠느냐고 했다. 그러나 2년 후 국정농단 사태 때 우리는 소문이 사실에 가까웠음을 확인했다.
지금은 어떤가? 윤석열 정부의 국정운영 수준은 정진석, 김태효, 김건희, 천공 같은 사람들이 결정하는 듯하다. 김건희 씨의 국정농단 의혹은 아직은 의혹이다. 대통령실 용산 이전부터 대통령 외교 일정 조정, 정부와 공공기관 인사, 여당의 공직선거 후보 공천 개입까지 세간에 떠도는 모든 국정농단 의혹 가운데 무엇이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머지않아 밝혀질 것이다. 만약 그 모두가 사실이라면 전적으로 김건희 씨의 책임인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김건희 씨는 윤석열이 만든 권력의 공백을 차지한 여러 주체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대통령 개인이 국정의 모든 과제를 직접 결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직접 결정하지 않을 뿐 권력의 공백을 허용하는 건 아니다. 자신이 하려는 일을 자신보다 더 잘 할 사람에게 권한을 위임한다. 믿을만한 사람을 총리, 비서실장, 장관 등으로 발탁해 대신 일하게 하고 자신은 대통령실 참모들의 보좌를 받으면서 그들을 관리 감독한다. 그런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윤석열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 그저 권력의 맛을 즐길 뿐이다. 그래서 친한 사람, 잘 아는 사람, 충신으로 위장한 아부꾼들에게 권력을 맡겼다. 윤석열이 조장한 권력의 공백을 누구보다 먼저 김건희가 차지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니 당연한 일 아닌가. 공백의 다른 일부는 ‘모피아’가 점령했다. 그들은 법인세 세율을 내리고 과세표준을 축소함으로써 2년간 90조 원에 육박하는 세수결손을 내면서 재벌 대기업에 막대한 이익을 안겼다. 재정 적자를 핑계로 해마다 1천억 원 안팎의 국유재산을 눈 밝은 업자들한테 팔아넘겼다.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들려고 국가와 국민을 더 가난하게 만들었다. 김태효를 비롯한 뉴라이트 세력도 권력의 공백 한 모퉁이를 차지했다. 그들은 각급 인사라인을 장악해 정부 부처와 공공기관의 요직을 극우 유튜버와 뉴라이트 추종자들로 채우고 있으며 시대착오적 이념을 내세워 외교와 남북관계를 냉전시대로 되돌렸다. 윤석열은 충성스러운 부하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들은 대통령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익과 이념을 위해서 일한다.
왜 지금 시점에서 김건희 씨의 국정농단 증거가 드러나고 있는가? 그것도 권력의 공백 현상 때문이다. 2014년의 ‘십상시 문건’도 그랬다.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박근혜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율이 하락하고 정부 여당의 무능에 대한 국민의 비판의식이 높아진 시점에서 국정농단에 관한 소문과 증거가 세상에 나오기 시작했다. 국민의 정부여당에 대한 정치적 불신은 진정한 의미의 권력 공백 현상을 빚어낸다. 대통령과 국민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야당의 활동 폭은 넓어지고 위세는 강해진다. 권력의 정치적 무게중심이 야당으로 이동해 정권 교체의 가능성이 높아질수록 윤석열 정권의 불법과 비리가 드러날 확률도 상승하며, 그런 일이 실제 벌어지면 정권 교체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 우리는 지금 그런 현상을 목격하는 중이다.
앞으로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같은 형태의 비리 폭로와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율 하락 현상이 서로를 부추기며 이어질 것이다. 김건희 씨는 법률적 책임을 질 수 있을 뿐 정치적 책임은 떠맡지 못한다. 정치적 책임은 대통령 권력을 공백으로 만든 윤석열한테 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윤석열 부부를 맹종하는 척했던 이른바 ‘윤핵관’과 여전히 윤석열 부부 방탄에 몸을 던지는 국힘당 정치인들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누구 말대로 김건희 씨를 절에 보내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아니다. 김건희가 절에 가도 문제의 원인은 그대로 용산에 있다. 검찰이 수사를 해서, 또는 특검이 출범해서 김건희 씨를 구속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국민경제의 침체와 국가재정의 파탄, 정부의 무능과 정치 실종 등 오늘 대한민국이 직면한 위기는 김건희가 아니라 윤석열이 만들었다. 김건희 때문에 윤석열이 망하는 게 아니다. 윤석열 때문에 김건희도 같이 망하는 것이다. 김건희는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증상일 뿐이다. 윤석열이 대통령 자리에 있는 한 대한민국은 경제적 침체와 정치적 문화적 퇴행의 수렁을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