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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지수 잘못 찾은 ‘체코 원전 수출’의 꿈(1)

오태규 칼럼
언론인
일본의 최대 제철 회사인 일본제철이 미국 제조업의 상징인 US스틸을 매수하려는 꿈이 무산 위기에 처했습니다. 일본제철은 지난해 12월, US스틸을 약 140억 달러(약 18조 7천억 원)에 매수하기로 하고 인수 절차를 착착 밟아왔습니다. 미국과 일본의 경제계에서도 양국 경제에 서로 도움이 된다며 두 손 들어 환영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순조롭게 진행되던 인수 절차에 급제동이 걸렸습니다. 바로 11월 5일로 다가온 미국 대선이 순항을 가로막고 나섰습니다. 물론 일본제철도 대선 변수에 대비하지 않은 건 아니었습니다. 올 1월에 인수 저지 의사를 밝힌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선거전에서 점점 우세를 보이는 것으로 드러나자, 7월에 갑자기 1기 트럼프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마이크 폼페이오를 고문으로 영입했습니다. 의사결정이 늦기로 유명한 일본기업으로선 매우 발 빠른 대응이었습니다. 문제는 민주당의 조 바이든 대통령과 새로 민주당 후보가 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의 태도도 공화당과 차이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민주·공화 양당이 모두 반대하는 근본 원인은, US스틸의 소재지가 미국 대선의 향방을 쥐고 있는 펜실베이니아주라는 점입니다. 이전 두 차례의 선거 결과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곳에서 이긴 후보가 모두 대통령에 당선했습니다. 그만큼 펜실베이니아주는 미 대선을 좌우하는 7개 경합 주에서도 가장 요지입니다. 경합 주 가운데 선거인단 수도 19명으로 가장 많습니다.

미 대선에서 승리하려면 쇠락한 공업지대의 좌절한 노동자 표를 끌어모으는 게 관건인데, 이곳이 바로 노동자들의 표심을 좌지우지하는 상징 지역입니다. 그래서 공화·민주 어느 당도 US스틸의 일본제철 매각을 반대하는 노동자의 심기를 감히 거슬리기 어려운 사정이 있습니다. 자칫 이곳의 분위기가 또 다른 경합 주이자 쇠락 공업지대인 미시간주와 위스콘신주로 퍼져나갈 것을 우려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바이든 대통령도 이미 3월에 매각 반대 성명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9월 초엔 그가 ‘안전 보장상의 이유’로 아예 인수 중지 명령을 내린다는 보도가 잇따랐습니다. 그러자 일본제철뿐 아니라 일본 경제계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일본제철 회장이 직접 바이든 대통령에게 ‘적절한 판단’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고, 한국의 전경련과 같은 일본의 대기업 연합 단체인 게이단렌이 ‘공정한 심사’를 촉구하는 논평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제철과 일본 경제계의 맹렬한 로비 결과인지 모르겠지만, 일본제철의 인수 여부를 최종 판단하는 대미외국투자위원회(위원장, 재닛 옐런 재무장관)가 최근, 9월 23일까지였던 심사 기한을 3개월 연장하기로 했습니다. 대선 이후로 최종 결정을 연기하겠다는 건데, 설사 그렇게 한다 해도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어렵다고 일본 미디어들은 보도하고 있습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한 번 뱉어놓은 반대 의사를 번복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게죠.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 파동은, 윤석열 정권의 체코 ‘원전 수출’ 추진에도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첫째, 미국은 아무리 가까운 동맹국이라도 자신의 이익이 걸린 사안에 대해서는 절대 봐주는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의 동맹국들을 중요도 순으로 줄 세운다면, 대서양의 영국과 함께 태평양의 일본이 맨 앞을 다투고 한국은 일본보다 여러모로 뒷줄이라는 건 국제사회의 상식입니다. 이번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은 자신의 국익을 위해서는 제1급 동맹국이라도 인정사정이 없습니다. 하물며 동맹 순위에서 일본보다 한참 뒤로 밀리는 한국엔 어떻겠습니까. 이런 미국의 태도는 미-중 패권 경쟁 속에서 더욱 강해졌습니다.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약간의 정도 차이는 있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둘째, 미국 지도자들의 가장 긴급하고 중요한 관심사는 당장 코앞에 있는 대선 승리라는 점입니다. 공화·민주 양당은 지금 한창 내전을 방불케 하는 ‘대선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대선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상황입니다. 국내외의 많은 전문가들은 대선이 끝난 뒤에도 미국 정치의 이념적 양극화와 극단적 대결 분위기가 쉽게 해소되지 않을 것으로 전망합니다.

만일 US스틸이 최대의 경합 주이자 쇠락한 산업지대인 펜실베이니아에 있지 않았다면, 미국 양당이 모두 양국의 경제계가 환영하는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를 반대하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일본제철의 인수가 무산된다면, 전적으로 때와 장소를 잘못 만난 탓이라고 봐야 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20%의 최저 지지율을 안고 추석 연휴 뒤인 19일부터 2박4일 일정으로 체코 국빈 방문을 마치고, 22일 귀국했습니다. ‘팀 코리아’, ‘원전 동맹’ ‘원전 르네상스’ 등의 뜬금없고 과장된 조어에서 엿볼 수 있듯이, 원전 수출만을 위한 ‘목적타 방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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