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미국 지도자들의 가장 긴급하고 중요한 관심사는 당장 코앞에 있는 대선 승리라는 점입니다. 공화·민주 양당은 지금 한창 내전을 방불케 하는 ‘대선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대선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상황입니다. 국내외의 많은 전문가들은 대선이 끝난 뒤에도 미국 정치의 이념적 양극화와 극단적 대결 분위기가 쉽게 해소되지 않을 것으로 전망합니다.
만일 US스틸이 최대의 경합 주이자 쇠락한 산업지대인 펜실베이니아에 있지 않았다면, 미국 양당이 모두 양국의 경제계가 환영하는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를 반대하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일본제철의 인수가 무산된다면, 전적으로 때와 장소를 잘못 만난 탓이라고 봐야 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20%의 최저 지지율을 안고 추석 연휴 뒤인 19일부터 2박4일 일정으로 체코 국빈 방문을 마치고, 22일 귀국했습니다. ‘팀 코리아’, ‘원전 동맹’ ‘원전 르네상스’ 등의 뜬금없고 과장된 조어에서 엿볼 수 있듯이, 원전 수출만을 위한 ‘목적타 방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덤으로 바닥을 치고 있는 지지율을 끌어올리겠다는 정치적 속셈도 있었겠죠. 그러나 뚜껑을 열어 보니, 체코 방문 직전 다 성사된 것처럼 떠벌였던 체코 원전 수출이 현찰이 아니라 어음이란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윤 대통령과 페트르 파벨 체코 대통령으로부터 정상회담 뒤 공동 기자회견에서 나온 엇갈린 말이 이런 실상을 잘 보여줬습니다. 기자회견에서 한국수력원자력과 웨스팅하우스의 지식 재산권 분쟁 관련한 질문이 나오자, 먼저 윤 대통령이 “양국(한-미) 정부는 원전 협력에 확고한 공감대를 공유하고, 우리 정부도 한·미 기업 간 원만한 문제 해결을 지원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 때처럼 잘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그 말이 나오자마자 파벨 대통령은 “최종 계약이 체결되기 전 확실한 건 없다. 분쟁이 성공적으로 해결되는 것이 이로운 것이고, 오래 끌지 않고 합의를 보는 것이 양쪽에 유리하다. 이 문제가 성공적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믿고, 나쁜 시나리오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다”라고 토를 달았습니다. 체코 대통령의 말에서 외교적 수사를 걷어내면 한국과 미국 사이의 분쟁 해결이 선결 과제라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여기서 일본제철의 사례와 비교해 보면, 윤 대통령의 발언이 얼마나 순진하고 현실성이 없는지 드러납니다. 우선, 한-미 두 나라가 ‘원전 협력에 확고한 공감대를 공유’하는 것과 한국 기업이 미국 기업의 지식 재산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주장은 전혀 다른 사안입니다. 더구나 윤 대통령은 지난해 4월 미국 국빈 방문 때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함께 발표한 ‘워싱턴선언’에서, 원자력 분야의 ‘지식 재산권 존중’이라는 미국의 요구를 덥석 받아들인 바 있습니다. 윤 정권이 아무리 동맹을 강조하고 미국을 짝사랑해도, 미국은 그런 것에 눈도 끔쩍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챙긴다는 냉엄한 현실을 모르거나 외면한 언행입니다. 일본제철은 지식 재산권 분쟁도 없고 도리어 미국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미-일 양국 경제계의 의견이 쇄도하는데도, 집중적인 견제와 냉대를 받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정상의 발언으로 볼 때, 윤 대통령은 너무 성급했습니다. 일이 성사되기도 전에 김칫국부터 마셨습니다. 원전 수출을 매듭지으려면 체코를 방문하기 전에 먼저 미국(웨스팅하우스)과 지식 재산권 분쟁부터 확실하게 타결해야 했습니다. 장관급에서 풀리지 않으면 대통령이 직접 미국으로 달려가 풀겠다는 결기라도 보였어야 했습니다. 미국과 분쟁이 타결되지도 않았는데 마치 ‘다 된 밥’인 양 체코로 달려간 것은 번지수를 잘 못 찾은 헛된 방문이었습니다. 원전 수출이라는 허황된 꿈에 취해, 지지율 올리기에 급급한 나머지, 바늘허리에 실을 매고 달려든 꼴이 됐습니다.
일본제철 사례와 비교하는 김에 한수원에 지재권 소송을 제기한 웨스팅하우스가 미국 어느 곳에 있는 기업인지 찾아봤습니다. 우연하게도 일본제철이 인수하려는 US스틸과 같은 펜실베이니아주에 본사를 두고 있었습니다. 사원은 9천 명이었습니다. 웨스팅하우스는 한때 가전제품도 생산하고 방위산업으로 명성을 날렸지만, 현재는 원자력 전문기업으로 변신했습니다. 쇠락한 제조업인 제철 회사와 사정은 좀 다르겠지만 같은 펜실베이니아 소재 기업이라는 점에서 다른 곳보다 보호주의 정치 바람을 강하게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말 네덜란드 방문 때 ‘반도체 동맹’을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그리고 불과 며칠 뒤 네덜란드의 반도체 장비회사 에이에스엠엘(ASML)은 최첨단 노광장비를 삼성전자가 아닌 미국의 인텔에 맨 먼저 납품했습니다. 한국과 체코의 ‘원전 동맹’도, 말만 요란할 뿐 전혀 실속이 없었던 네덜란드와의 반도체 동맹 짝이 날 가능성이 큽니다. 이번 윤 대통령의 체코 방문을 보면서 역시 ‘잘하는 외교’는 화려한 백 번의 말이 아니라 한 번의 확실한 실리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걸 다시금 실감합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