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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가난, 도둑맞은 민주주의(2)

강수돌 칼럼
고려대 명예교수
이들이 민주주의 시스템을 마치 소리 없는 지뢰로 파괴하듯 허물고 있다. 셋째, 지자체 선거, 총선, 보선, 그리고 대통령 선거에 이르기까지 여태 나는 조직적 댓글부대나 개표 부정이 문제라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충격적으로 드러난 바, 선거 국면에서 유권자를 대상으로 여러 차례 실시된 ‘여론조사’ 자체가 멋대로 조작되었다! ‘엿장수 맘대로’ 조작된 여론조사는 동요하는 표심에 영향을 줘 특정인을 대통령으로 만들고, 또 그 보상으로 특정인 공천이 된 것도 폭로됐다. ‘여사’의 입김은 넓고도 세다.

10월 국정감사에서 양심적 검사 출신의 박은정 의원은 “공천헌금-대가성 여론조사가 사실이면, 뇌물죄 중 가장 죄질 나쁜, 수뢰 후 부정 처사 죄”가 성립한다고 역설했다. 박 의원은 “명태균을 대선 경선 이후 만난 적 없다는 윤 대통령의 해명과 달리 명태균 ‘박사’발 국정개입 의혹들로, 지난 대선이 무효화 될 수도 있는 ‘도둑맞은 대선’의 증거들이 쏟아지고 있다”며 개탄했다. 게다가 “대선 당일에도 핵심 참모진들과 ‘명태균 보고서’가 공유됐고, 이를 토대로 전략회의도 했다”는 내부고발(신용한 전 서원대 교수)까지 나왔다.

초등생 아이들도 익히 들었을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 뒤엔 이른바 ‘선수’들이 작전세력이 되어 열심히 뛰었다. 그 과정에서 대통령도 특정 회사의 주가를 풍선처럼 부풀게 하기 위해 나름 열심히 뛰었다. 실속이 거의 없는, 체코 원전 수출 계약이나 우크라이나 전후 재건 사업 약속 같은 걸 받아내려 한 것이 그 증거다. 대통령 취임 전부터 원전 부활을 외쳤는데, 원전 사업이 국내외에서 왕성하면 원전 부품 관련 기업인 ‘우리기술(주)’ 주가가 급등할 것이고,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끝나면 복구 및 재건 사업에 ‘삼부토건(주)’ 같은 회사의 주가가 급등할 것이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기업들의 주가 역시 치솟을 것이다.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과 관련된 선수들이나 작전세력, 그리고 ‘여사’를 포함한 쩐주들이 여기에도 다 걸쳐 있었다. 불법 투자자문사인 블랙펄인베스트먼트(BP) 대표 이종호로 상징되는 작전세력들은 도이치모터스, 삼부토건, 쌍방울 주가조작에 종횡으로 연결돼 있다. 그런 인연들이 채 상병 사망 사건의 진실도 교묘히 가렸다. (희토류 사업과 관련해) 북한과 접촉을 했던 ‘쌍방울’의 경우, 극히 고약하게도 자기들의 주가조작 사실을 숨기려고 오히려 이재명 민주당 대표(당시 경기도지사)에게 뇌물죄를 뒤집어 씌우려는 공작을 강행하다가 오지게 들킨 상태다.

이렇게 대통령 부부는 ‘작전세력’들과 사실상의 표리관계를 이루면서 ‘비즈니스’를 위해 수 억, 수십 억 혈세를 쓰면서 지구촌을 여행한다. 사회정의를 바로 세우는 검찰이 아닌, ‘비즈니스 맨’이 된 검찰 출신 대통령! 그것도 대한민국 아닌, 가족을 위한 비즈니스! 이게 자본주의요, 현 한국 자본주의 정치의 실상이다.

약 50년 전 박완서 작가의 소설 속 여성이 ‘도둑맞은 가난’을 치욕적으로 느꼈듯, 오늘의 우리 역시 ‘도둑맞은 민주’를 뼈저리게 체험한다. 이 사태, 이 배신감을 어찌해야 할까? 그런데, 흥미롭게도 1975년 1인당 국민소득이 약 600달러였고 2023년엔 3만 달러를 훌쩍 넘었으니 50년 만에 평균 50배 이상 잘 살게 되었다. 물론, 불평등과 양극화는 심각하다. 아직도 쪼들리게 어려운 이가 많지만 평균 수준은 많이 올랐다. 50년 전 시내버스비가 15원이었는데, 지금은 1500원 가까우니 단순 물가로 100배 뛰었다. 이제 예전의 그런 가난은 민속박물관에서나 볼까 좀체 찾기 어렵다. 어렵다고들 하지만, 백화점이나 쇼핑몰에 가면 사람이 많다. 심지어 ‘명품’을 사려고 새벽부터 몰려들기도 한단다.

잘 생각해 보니, 오히려 당시 내가 자라던 가난한 달동네에서는 수돗물을 하루에 한두 시간씩만 받았고, 세숫물도 함부로 버리지 않았다. 이웃사촌 개념이 살아 있어서 부침개 하나를 부쳐도 이웃과 오순도순 나눠 먹었다. 봄, 가을 농번기엔 학교에서 대대적으로 농촌 봉사활동을 나갔다. 옆집에 대소사, 경조사가 생기면 서로 나서서 일손을 거들었다. 당시만 해도 두레나 품앗이 문화가 살아 있었다. ‘똥물 튀는’ 변소조차 그 똥오줌을 밭에 거름으로 씀으로써 수질오염은커녕 생태순환에 기여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다투고 와도 어른들이 변호사까지 붙여 소송을 제기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대명천지에 선거도, 민주도, 혈세도, 행복도 도둑맞고 있다. 가난을 도둑맞게 된 그 흐름들(부자 중독증, 출세 중독증) 탓에 이제는 민주까지 도둑맞고 있는지 모른다. 역으로, ‘도둑맞은 가난’을 우리가 얼마나 어떻게 되찾을 수 있는지에 따라 ‘도둑맞은 민주’ 역시 딱 그만큼 회복될 것 같다는 특별한 느낌도 든다. 그러기 위해선 민주주의를 두려워해선 안 되듯 가난을 두려워 않아야 한다. 궁핍은 면하되, 검소하게 살며 서로 나누고 보살피며 사는 게 기후위기 시대에 필요한 삶의 방식이 아닐까? 피터 모린(1877~1949)의 역설처럼, “아무도 부자가 되려 하지 않는다면 모두 부자가 될 것이요, 모두 가난해지려 하면 아무도 가난해지지 않을 것”이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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