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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판사의 생각(1)

유시민 칼럼
작가
친구야, 보내준 메일 잘 읽었다. 첨부한 동영상도 보았어. 전부 내가 한 판결을 비난하는 내용이더구나. 너는 철학자니까, 우리나라 사법 시스템과 형사 법정의 현실을 모르니까, 그런 이야기에 끌릴 수도 있다고 봐. 친구니까,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할게. 이런 얘기 공개적으로는 안 하지만 너한테는 말하고 싶다. 날 손절할지도 모른다고? 그래, 할 땐 하더라도 일단 들어는 봐.

법정이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세우는 곳이라고? 아니야. 몰라서 하는 오해야. 민사 법정은 몰라도 형사 법정만큼은 절대 그렇지 않아. 너도 그렇고, 네가 보내준 동영상에서 떠든 이들도 그렇고, 다 그렇게 오해한 탓에 나를 비난하는 거야. 나는 현실을 알아. 내가 부장판사야. 형사합의부 재판장이지. 경력이 20년 넘어. 나는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실현하는 사람이 아니야. 단 하루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어. 그건 전적으로 틀리진 않지만 대체로 틀린 말이야. 판사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냐고? 검찰이 기소한 형사 피고인의 유무죄를 판단하고 유죄인 경우 적절한 형량을 주는 것이지. 검찰과 피고인 측이 법정에 낸 증거와 정황과 논리를 보고 모든 걸 판단해. 법정 밖에서 벌어지는 일은 상관하지 않아.

우린 검사가 기소한 사건만 취급해. 검사가 기소하지 않으면, 아무리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어. 대통령과 가족과 측근들의 범죄 혐의는 덮고 야당 정치인과 가족만 탈탈 털어 처벌하는 게 정의로운 법 집행이냐고? 물론 아니지. 대통령이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사법제도를 악용하는 것 아니냐고? 그래, 맞아. 그렇지만 그게 판사 책임은 아니잖아. 검찰을 욕해야지 왜 법원을 비난해? 말했잖아. 검사가 기소하지 않은 사건은 형사 법정에 오지 않는데, 나더러 어쩌라고!

기소당한 야당 정치인과 가족들한테 무죄를 선고하라고? 그게 정의라고? 아니야.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 판사는 증거를 보고 법리에 따라 판결해. 정치적 목적으로 기소했다 해도, 증거를 조작하고 참고인을 회유해 허위 진술을 받았다고 해도, 검찰이 낸 증거와 증언이 허위라는 걸 피고인이 증명하지 못하면 유죄 선고를 할 수밖에 없어. 증거 조작 여부와 증언의 허위성 여부를 판사는 직접 조사하지 않아. 하려면 할 수는 있지만 그럴 의무가 없어. 처리해야 할 사건이 많아서 안 그래도 바쁜데, 어떻게 그런 일까지 하겠어?

나만 그런 게 아냐. 지금 판사들만 그런 것도 아냐. 판사는 대부분 언제나 그렇게 해왔어. 조선총독부 시절부터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시대를 거쳐 민주화 시대까지 세상은 달라졌지만, 판사는 달라지지 않아. 판사가 독립운동가를 감옥에 넣은 게 아니야. 검사가 독립운동가를 기소했고 그들이 실정법을 위반한 혐의를 입증했기 때문에 유죄 선고를 했던 거라고. 우리 대법원은 정치인 조봉암한테 사형 선고를 했어. 이승만이 바로 집행했지. 인혁당 관련자들한테도 사형을 선고했어. 박정희가 다음 날 새벽 바로 집행했지. 김대중한테도 사형 선고를 했어. 전두환이 감형해 미국에 보내서 살았지만, 대법원은 김대중을 죽이라고 했어. 왜? 검찰이 기소했고 김대중이 무죄를 증명하지 못했으니까. 피고인이 무죄를 증명하지 못하면 판사는 유죄 선고를 할 수밖에 없어. 전두환이 총칼로 협박해서 그랬던 게 아니야. 협박할 필요가 없었어. 굳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하니까.

그 사람들한테 대법원이 재심 무죄를 선고했지 않았느냐고? 그건 세월이 지났으니까, 시대가 달라졌으니까, 사형을 선고한 증거와 증언이 고문과 조작으로 만든 가짜였음이 밝혀졌으니까 그렇게 한 거야. 유죄를 선고한 원심 판사가 잘못했다고 인정한 게 아니라고. 판사의 잘못을 인정한 것처럼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일 뿐이야. 다시 말할게. 형사 법정은 진실을 밝히는 곳이 아니고, 판사는 정의를 실현하는 사람이 아니야. 친구야. 나더러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실현하라고 말하는 네가 버겁다. 그렇지 않아도 그런 사람이 많아서 사는 게 쓸데없이 고달픈데, 너라도 그런 말 안 하면 안 되겠니?

판사들이 보수적이라 진보 세력한테 적대적이라고? 천만에! 우리가 지금의 야당 사람들한테만 유죄 선고를 했어? 아니지. 전두환·노태우도 집어넣었잖아. 박근혜·이명박도 중형을 내렸잖아. 그 사실을 왜 모른 척하지? 우린 누구든 검찰이 기소하고 범죄 증거가 확인되면 교도소에 보낸다고. 노무현도 검찰이 기소해서 혐의를 입증했으면 집어넣었을 거야. 윤석열·김건희 부부도,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검찰이 기소하고 증거가 분명하면 징역형 내릴 거라고.
대통령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데 그냥 내버려두고 낙선한 야당 정치인한테만 징역형을 주는 건 정의롭지 않다고? 내 생각은 달라. 윤석열의 범죄를 덮었다는 이유로 이재명의 범죄도 봐주는 건 더 큰 불의를 저지르는 거야. 범죄자 둘 모두를 놓치는 것보다는 하나라도 처벌하는 게 더 정의로운 것 아닌가? 그게 부당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생각 하는 사람들이 현직 대통령과 배우자도 검찰이 기소하게 만들어야지. 내 재판부에 배당되면 범죄의 증거가 있는지 살펴보고 있으면 합당한 벌을 줄게.

그 정도 하고 다음 이슈로 넘어가마.<계속>

⁜이 글에 나오는 인물과 사건은 자유로이 꾸며낸 것이고 누구를 연상한다면 그건 의도나 우연의 산물이 아닌 그저 불가피한 일이라는 점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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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칼럼은 시민언론 민들레에 기 게재된 내용임을 밝힙니다. 외부원고 및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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