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개 판사가 대선에서 국민 절반의 표를 받았고 지금 국민 지지율이 독보적으로 높은 차기 대선주자의 피선거권을 박탈한 행위는 민주주의 원리에 어긋난다고? 국민의 선택권을 제약해 주권재민 원리를 짓밟았다고? 난 인정하지 않아.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런 판결을 했겠어? 난 판사로서 할 일을 했을 뿐이야. 우리나라는 법치국가라고들 하는데, 법치국가가 뭐야? 법이 지배하는 사회라는 것이지. 법치국가에서는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해야 해. 누구도 예외가 되어서는 안 돼. 지지율 일등 차기 대선주자라고 해서 범죄 혐의가 입증되었는데도 무죄를 줘야 하나? 선거법 위반 혐의가 입증되어도 형량을 벌금 백만 원 아래로 해야 하나? 그건 아니지.
맞아. 나는 일개 판사야. 하지만 형사법정에서 유무죄를 가리고 형량을 결정하는 능력은 내가 최고야. 유권자 2000만 명을 모아 놓는다고 해서 나보다 더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어. 나는 전교 1등만 모이는 특목고에서도 1등을 다툰 사람이야. 대한민국 최고 대학 최고 학과에서 법을 공부했고 사법시험을 초고속 합격했지. 연수원 성적이 좋아서 판사가 되었고, 20년 동안 온갖 사건을 다루어 봤어. 우리 헌법과 법률은 일개 판사인 나한테 정치인의 피선거권을 박탈할 권한을 주었어. 나는 대한민국 최고 전문가로서 그 권한을 행사했을 뿐이야.
주권자인 국민의 뜻? 판사는 국민 여론을 살필 필요가 없어. 물론 살펴도 되지만 의무는 없다는 말이야. 판사가 국민 여론을 따라야 하는 게 아니야. 국민이 판사의 결정을 따라야지. 국민은 판사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그 조건에서 주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헌법에 따르면 그래.
내가 피고인에 대한 정치적 편견 때문에 중형을 선고했다고? 서로 다른 맥락에서 한 말을 하나로 엮어서 거짓말로 판단했다고? 피고인이 위협을 느끼게 만든 수많은 중앙정부 공문서는 무시하고 가장 온건한 문장으로 쓴, 사건과 직접 관련되지 않은 공문서 하나만 증거로 채택했다고? 그건 그 사람들 생각이고, 나는 생각이 달라. 형사 재판에서 누구 생각이 중요한가? 판사 생각이 중요하지.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여론을 살필 거라면 판사가 왜 필요해? 사법시험 제도나 변호사 자격시험을 왜 만들었어? 북한식으로 아무나 판사 자리에 앉혀 놓고 인민재판 하면 될 것 아니야?
법정에 나온 증거의 의미와 가치를 해석하고 평가할 권한은 온전히 판사의 것이야. 헌법이 누구도 판사가 하는 일에 간섭하지 말라고 했어. 그런 점에서 ‘판사는 하느님과 동기동창’이라고 할 수 있어. 법정에서는 판사가 하느님이지. 사법부라는 건 가상의 존재야. 대한민국에 실제로 존재하는 건 사법부가 아니라 자신의 법정에서는 신과 같은 권능을 행사하는 3200여 명의 판사들이지. 우리는 지지율 1등 차기 대선후보도 합법적으로 제거할 권능이 있어. 그런 결정을 할 때는 인간계를 넘어 신계의 일원이 된 느낌을 맛보곤 하지.
그래, 내가 그렇게 판단했어. 차기 대선후보 지지율 1등인 피고인의 국회의원 자격을 빼앗고 차기 대통령 선거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게 옳다고. 대한민국을 위해 바람직하다고. 왜?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형사 법정에 선 그 자체가 문제거든.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겠어? 판결 이유는 중요하지 않아. 판결문은 적당히 쓰면 돼. 검사가 내세운 증거만 채택하고 검사의 논리를 인용하면 돼. 나한테는 그럴 권한이 있어. 판사들이 대개 나하고 비슷하니까 상급심에서 엎어지는 일은 없을 거야. 특이한 판사도 더러 있지만 많진 않아. 특이한 판사는 어떠냐고? 쓸데없는 데 집착하지.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하라”거나,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입증되었을 때만 범죄 사실을 인정하라”거나, “열 도둑을 놓치더라도 한 사람을 억울한 피해자로 만들지 말라”거나, 뭐 여하튼 그 비슷한 걸 원칙이라고 하면서 지키려고 해. 옳긴 하지만 현실에서는 의미가 없는 소위 ‘공자님 말씀’일 뿐인데 말야.
현실은 어떠냐고? 검사가 유죄를 입증해야 하는 게 아니라 피고인이 무죄를 입증해야 해. 그걸 못하면 유죄야. 대한민국의 형사법정은 무죄 추정의 원칙이 아니라 유죄 추정의 원칙이 지배하지. 증거 없이도, 심지어는 범죄 장소와 시간을 검찰이 특정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백하게 무죄를 입증하지 못하면 유죄 선고를 해. 국가정보원 비밀요원이 작성한 보고서도 무죄의 증거일 경우에는 의심할 여지 없이 명백한 사실임을 입증하지 못한다면서 배척하고, 주가조작 전과가 있는 형사 피고인의 증언이 유죄의 증거인 경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허위임이 증명되지는 않았다는 이유로 채택하는 식이지. 왜 그렇게 하느냐고? 굳이 설명해야 하나? 너 같으면 기소되어 법정에 선 피고인과 사법시험을 합격했고 연수원 성적이 우수해 검사가 된 대학 동창 중에 누구를 더 믿겠니?
판사들이 무죄추정의 원칙을 철저히 지키는 경우가 없는 건 아냐. 하지만 드문 예외지. 예컨대 현직 판사가 기소되면 모든 것을 법과 원칙대로 해. 조금이라도 의심이 남으면 무죄로 하고, 증거가 의심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할 때도 무죄를 줄 수 있는 법리를 받아들이지.<계속>
⁜이 글에 등장한 인물과 사건은 자유로이 꾸며낸 것이고 누구를 연상한다면 그건 의도나 우연의 산물이 아닌 그저 불가피한 일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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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칼럼은 시민언론 민들레에 기 게재된 내용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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