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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판사의 생각(3)

유시민 칼럼
작가
대한민국에 실제로 존재하는 건 사법부가 아니라 자신의 법정에서는 신과 같은 권능을 행사하는 3200여 명의 판사들이지. 우리는 지지율 1등 차기 대선후보도 합법적으로 제거할 권능이 있어. 그런 결정을 할 때는 인간계를 넘어 신계의 일원이 된 느낌을 맛보곤 하지. 그래, 내가 그렇게 판단했어. 차기 대선후보 지지율 1등인 피고인의 국회의원 자격을 빼앗고 차기 대통령 선거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게 옳다고. 대한민국을 위해 바람직하다고. 왜?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형사 법정에 선 그 자체가 문제거든.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겠어? 판결 이유는 중요하지 않아. 판결문은 적당히 쓰면 돼. 검사가 내세운 증거만 채택하고 검사의 논리를 인용하면 돼. 나한테는 그럴 권한이 있어. 판사들이 대개 나하고 비슷하니까 상급심에서 엎어지는 일은 없을 거야.

특이한 판사도 더러 있지만 많진 않아. 특이한 판사는 어떠냐고? 쓸데없는 데 집착하지.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하라”거나,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입증되었을 때만 범죄 사실을 인정하라”거나, “열 도둑을 놓치더라도 한 사람을 억울한 피해자로 만들지 말라”거나, 뭐 여하튼 그 비슷한 걸 원칙이라고 하면서 지키려고 해. 옳긴 하지만 현실에서는 의미가 없는 소위 ‘공자님 말씀’일 뿐인데 말야.

현실은 어떠냐고? 검사가 유죄를 입증해야 하는 게 아니라 피고인이 무죄를 입증해야 해. 그걸 못하면 유죄야. 대한민국의 형사법정은 무죄 추정의 원칙이 아니라 유죄 추정의 원칙이 지배하지. 증거 없이도, 심지어는 범죄 장소와 시간을 검찰이 특정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백하게 무죄를 입증하지 못하면 유죄 선고를 해. 국가정보원 비밀요원이 작성한 보고서도 무죄의 증거일 경우에는 의심할 여지 없이 명백한 사실임을 입증하지 못한다면서 배척하고, 주가조작 전과가 있는 형사 피고인의 증언이 유죄의 증거인 경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허위임이 증명되지는 않았다는 이유로 채택하는 식이지. 왜 그렇게 하느냐고? 굳이 설명해야 하나? 너 같으면 기소되어 법정에 선 피고인과 사법시험을 합격했고 연수원 성적이 우수해 검사가 된 대학 동창 중에 누구를 더 믿겠니?

판사들이 무죄추정의 원칙을 철저히 지키는 경우가 없는 건 아냐. 하지만 드문 예외지. 예컨대 현직 판사가 기소되면 모든 것을 법과 원칙대로 해. 조금이라도 의심이 남으면 무죄로 하고, 증거가 의심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할 때도 무죄를 줄 수 있는 법리를 받아들이지.

너도 알잖아? 전직 대법원장, 또 그 사람하고 가까운 판사들이 소위 ‘사법농단’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다 무죄를 받았다는 거. 그런 사건에서는 공판 검사도 열심히 하지 않아. 꼭 판사한테만 그러는 건 아니야. 현직 검사나 판검사 출신 변호사가 형사 피고인으로 오는 경우에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해. 그래서 딸이 몇백만 원 장학금을 받은 교수는 징역형을 주지만, 아들이 50억 원을 받은 전직 검사는 무죄를 주는 거야. ‘법조가족’이잖아. 어쩌다 실수한 건데, 헌법과 형사소송법을 철저히 지키면서 재판을 해야지. 친구야. 판사가 뭐 그리 특별한 사람 아니라는 거, 나를 봐서 너는 잘 알잖아. 그런데 형사 법정이 뭐하는 곳인지는 모르는구나. 걱정해 줘서 고맙다. 네가 나를 손절하더라도, 친구로서 걱정해 주었다는 사실은 기억할게.

그렇지만 나를 걱정할 필요는 없어. 나를 욕하는 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할 방법은 없거든. 야당이 나를 탄핵해서 직무를 정지시킨다고 해도 같은 법조가족인 헌법재판관들이 돌려놓을 거야. 법정에서 마스크를 착용했기 때문에 법조 기자들도 길에서는 나를 알아보지 못해.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사진은 오래전 것이라 별 의미가 없어. 판사 일이 싫증나면 옷 벗고 나가서 변호사 할 거야. 마음만 먹으면 대형 로펌에 가서 돈 많이 벌 수 있어. 많진 않지만 공무원 연금도 받지. 나 욕하는 그 사람들, 그 사람들이 낸 세금으로 나한테 연금 주는 거야. 욕해도 상관없어. 그래서 혼자 이렇게 말하곤 하지. “내가 한 판결이 마음에 안 든다고? 그래서 당신들이 나를 뭐 어쩔 건데?!”

친구야. 너네 대학 교수들 시국선언문 봤어. 네 이름도 있더구나. 우리 모교 교수들은 아직 안 했던데, 거기도 언젠가는 하긴 하겠지. 대통령과 검찰과 법원이 법치주의를 내세워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있다고 썼던데, 난 동의하지 않아. 오늘의 모든 상황은 2022년 3월 9일 대한민국 국민이 선택한 것 아닌가? 현 정부는 네가 찬양해 마지않는 바로 그 민주주의가 만든 권력 아닌가? 민주주의 타령은 그만하면 좋겠다.
다음 달 동창회 모임에서 웃는 얼굴로 만나기를 기대하며, 이만 줄인다.<끝>

⁜이 글에 나오는 인물과 사건은 자유로이 꾸며낸 것이고 누구를 연상한다면 그건 의도나 우연의 산물이 아닌 그저 불가피한 일이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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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칼럼은 시민언론 민들레에 기 게재된 내용임을 밝힙니다.

외부원고 및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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