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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 타락하는 세 가지 방식(2)

강수돌 칼럼
고려대 명예교수
반면, 도이치모터스 관련, 수 억대 ‘쩐주’ 역할을 하며 2010~2011년에만도 약 14억 원 시세차익을 본 김건희는 대표이사 권오수와는 물론, 주가 조작의 ‘선수’들과 긴밀한 소통과 협의를 했다. 그럼에도 무혐의-무죄-불기소라니? 무덤에 누운 몽테스키외가 놀라 벌떡 일어날 일이다!

둘째,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 관련해 판·검사들이 법을 농락하고 있는 사태다. 이재명 대표와 관련해 진행 중인 재판도 5건 내외라 하는데, 그 중 하나가 공직선거법 위반(허위사실공표죄) 1심 재판(2024.11.15.)이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4부(부장판사 한성진)는 이 대표의 “(대장동 관련 김문기 씨 등과 찍은) 사진이 조작되었다”란 발언이나 “(성남 백현동) 토지 용도 변경이 국토부 압력으로 이뤄졌다”란 발언이 ‘허위사실 공표’라며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형을 선고했다. 이 판결에 일반 시민조차 그 판사가 “서울대 출신이 맞나?” 할 정도다. 심지어 한국경제신문 주필 출신의 대표적 보수 논객인 정규재 씨조차 “이재명 1심 판결, 잘못됐다”며 개탄했다. 몽테스키외가 그 판사의 멱살을 잡고 흔들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셋째, 최근 ‘뉴스타파’ 등 여러 매체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이(각종 불법 공천 개입 건은 별도로 하더라도) 2022년 대선을 앞두고(강남 소재 ‘예화랑’에) ‘가로수팀’이라는 불법 선거사무소를 운영했고 그 증거를 인멸한 의혹이 나왔다. 당시 윤 캠프 정책총괄지원실장으로 활약한 신용한 교수도 이게 사실이라 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서영교 진상조사단장)은 “원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한 후보 선거사무소, 중앙당과 시·도당을 제외한 다른 선거사무소는 불법”이라며 “(그런데 윤 대통령이 대선 후보 때) ‘예화랑’이라는 강남 소재 불법 선거사무소에서 정책과 선거조직을 이야기하고, 사람을 만나고, 선거 계획을 짰다”며 개탄했다.

윤 대통령의 절친인 연세대 로스쿨 이철호 교수 역시 “양재동에도(불법 선거사무소가) 있었음”을 인정했다. 흥미롭게도 일주일 전엔 ‘예화랑’ 간판이 있었는데, 그 사이에 간판이 없어지고 펜스가 쳐졌다. 증거 인멸 혐의! 특히 <주간조선>에 따르면 이 ‘예화랑’ 건물을 둘러싸고 이상한 부동산 거래 정황도 포착됐다. 즉, 한미약품그룹 모 계열사가 재건축이 예정된 예화랑 건물 소유주와 20년 장기로 보증금 48억 원, 월 임대료 4억 원의 부동산임대차계약을 맺었다.

상황이 이 정도면 수많은 언론이 달라붙어 진상을 밝히고, 그보다 먼저 검찰과 경찰이 특별 수사나 압수수색에 착수해야 마땅하다. 만일 야당이 그랬다면 벌써 쥐 잡듯이 뒤졌을 터! 이미 2017년 말 당시 20대 국회 시절, 진보당 윤종오 의원(울산 북구)이 선거관리위원회에 신고하지 않은 유사 선거사무실 운영 등 혐의로 벌금 300만 원,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고 의원직을 상실한 바 있다. 이런 중차대한 의혹에 대통령실조차 아무 반응도 않는다. 검찰이나 경찰 역시 복지부동이다. 만일 몽테스키외가 살아 있었다면 이런 법의 타락을 뭐라 했을지 궁금하다.

돌아보면, 몽테스키외가 죽고 한 세대 지난 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 ‘프랑스 인권선언’(자유, 소유, 안전, 저항)에 토대해 약 10년 넘게 세상을 뒤집었다. 세금과 폭정에 시달리던 농민과 평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게 도화선이 되어,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하지만 결국 혁명은 (공화정, 제정, 군주정 등) 복잡한 과정을 거치면서도 신흥 상공인, 즉 부르주아-자본 계급에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럼에도 민초들이 더 이상 구체제에 굴종하지 않고 역사의 전면에 나선 것은 대단한 변화라 봐야 한다.

그런 ‘대혁명의 기억’이 나치 하 ‘레지스탕스’(저항 운동)를 거쳐 약 170년 뒤(1968년) ‘68 혁명’에서 되살아났다. 당시 샤를 드 골 정부의 실정과 여러 사회 모순에 대해 시민의 저항과 노동자 총파업 투쟁이 거세게 일어 기존의 가치와 질서에 정면 도전했다. 처음엔 파리의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에 의한 학생 봉기가 불을 지폈다. 드 골 정부는 경찰력을 동원, 강경 대응했지만 오히려 시민의 분노를 부채질했다. 결국 프랑스 전역의 학생들과 파리 전 노동자의 2/3에 해당하는 노동자 총파업이 일어났다. 위기의식을 느낀 드 골 정부는 군사력을 동원하고 의회를 해산, 재총선을 실시했다. 드 골이 더 힘을 얻는 듯 했으나 이듬해 물러나고 말았다.

다시 ‘위기의 대한민국’으로 가보자. 지금 한국의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상황은 한마디로 ‘대략 난감’이다. 배로 비유하자면, 선장은 물론 1등 항해사조차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다. 따지고 보면, 5천만 민초들이 사는 중차대한 나라 경영에 철학도, 개념도, 역량도 없다! 이러다 언제 이 배가 좌초할지 모르겠다. 방향을 잃고도 그런 줄도 모른 채, 좌초나 난파 위기에 처한 이 ‘대한민국호’를 어떻게 구해야 하나? 몽테스키외 선생이시여, 당신이 상상 못할 정도로 기괴한, 세 번째 ‘법의 타락’을 하루가 멀다며 반복하는 이 대한민국을 과연 어떤 ‘법의 정신’으로 구할 수 있겠나이까? 설마, 1789년 ‘프랑스 대혁명’ 같은 거대한 물결이 치료약이라 권하는 건 아니옵겠지요?<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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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칼럼은 시민언론 민들레에 기 게재된 내용임을 밝힙니다.
외부원고 및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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