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한동훈-한덕수 담화'를 통해 드러난 건 '국정 방향'이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 사이에 맺어진 '협잡'의 내용만이 분명해졌다. 윤 대통령이 한 대표에게 '권력의 절대 반지'를 넘겨주는 대신 윤석열-김건희 부부의 안전을 보장해 준다는 게 핵심이다. '안전 보장'만 된다면 임기 단축을 받아들이겠다는 걸 전제로 한다.
거꾸로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절대 반지를 회수해 난장판을 벌이겠다는 윤 대통령의 으름장도 깔려있다. 이런 타협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기세등등하던 윤 대통령이 갑자기 한 대표에게 무릎을 꿇은 건 검찰 때문인 듯하다. 6일의 상황을 보자. 아침 일찍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과 이진우 수방사령관이 '배신'을 하고 홍장원 국정원 1차장의 '폭로'가 이어졌다.
이때만 해도 윤 대통령은 분기탱천했으나, 검찰의 동향을 보고받고는 그만 맥이 풀려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그리도 고분고분하던 심우정 검찰총장이 일방적으로 검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본부를 꾸린 데다가, 그 책임자로 '한동훈 사람'을 앉혔기 때문이다.
바로 박세현 서울고검장이다. "심우정은 자기를 총장 자리에 앉혀준 김주현 대통령실 민정수석과도 상의를 하지 않았다"라고 검찰 관계자가 귀띔을 해주었다. 윤 대통령으로서는 마지막 기댈 언덕마저 무너진 셈이다. 무릎이 부들부들 떨리며 털썩 주저앉은 모양새다.
그럼 박세현은 어떤 인물일까? 검찰 비상계엄 특수본 본부장인 그는 '친 윤석열'이지만 윤석열-한동훈 가운데 한 사람을 선택하라면 당연히 한동훈을 꼽을 수밖에 없는 인연이 있다. 둘은 현대고등학교와 서울대 법대 직계 선후배 사이다. 게다가 둘 다 대학 4학년 때 합격해 '소년 등과'의 공통점이 있다. '충암고 라인'이 지고 '현대고 라인'이 뜨는 징조일지도 모른다.
필자는 ‘한겨레신문’ 기자로서 1990년대 김영삼 정부 말기~김대중 정부 초기 검찰을 출입했다. 그때 한동훈 대표의 장인 진형구, 그리고 박세현 본부장의 부친 박순용을 만났다. 당시 대검찰청에서 진형구는 감찰부장, 박순용은 중수부장이었다. 시험은 박순용이 진형구보다 3년 앞섰지만 둘이 동갑이었고 술을 좋아해서 두 사람 사이는 각별했다. 언젠가는 박순용이 불러 중수부장 사무실에 가보니 진형구와 폭탄주를 돌리고 있었다. 벌건 대낮이었다. 기자들 몇을 더 불러서 술판이 커졌던 기억이 난다.
진형구는 다 알다시피 아들도 사위도 검사다. 손꼽히는 검찰 명문가다. 박순용 집안은 더 성골이다. 장인이 김영제 검사장이다. 박세현 입장에선 외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검사장이니 3대 내리 검사장을 배출한 집안이다. 박순용은 검찰총장까지 지냈다. 한동훈과 박세현 둘 다 검찰 내 '초엘리트 귀족' 집안인 것이다. 지금 검찰은 궁지에 몰렸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대로라면 윤석열만 죽는 게 아니라 검찰 조직도 비슷한 운명을 맞이할 공산이 크다.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다. 뭔가를 해야 한다. 명문가 자제들이 나섰다. 3선 충남지사 심대평의 아들인 심우정 검찰총장, 3대째 검사장 집안인 박세현 본부장이 나선 것이다.
한동훈 대표가 먼저 정보를 건네고 제휴를 제안한 것으로 보인다. 엊그제까지 윤 대통령과 맺었던 운명 공동체의 파트너가 이제 한동훈 대표로 바뀐 셈이다. 검찰은 어미를 잡아먹는 살모사의 본능을 가지고 태어났다고들 한다. 여태 어미 품 안에서 따뜻하게 지냈지만, 위기를 느끼는 순간 독사의 이빨을 어미 가슴에 박아 넣는다.
그럼 윤석열 김건희 부부에 대한 안전 보장은 어떻게 할까? 한동훈 대표가 권력을 넘겨받은 것처럼 말을 하고 있지만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다. 게다가 윤 대통령이 언제든 회수할 수 있는 권력이다. 그러니 한 대표로서는 어떻게든 '안전 보장' 약속을 지켜야 권력을 유지한다.
그 방법으로는 크게 세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는 '이승만의 길'이다. 미국 일리노이대학 최승환 교수가 6일 미국 정치전문지 <더힐> 기고문을 통해 윤 대통령을 하와이로 망명시키는 방안을 제시했다. 과거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CIA에 지시를 내려 망명을 도왔다며, 트럼프-바이든 대통령이 협조해야 한다고도 했다.
하지만 이게 가능한가? 이란의 독재자 팔레비를 망명시켰다가 미국은 이란이라는 나라를 잃었다. 팔레비야 오랫동안 미국에 석유를 퍼줬기에 마음의 빚이라도 있지만, 윤석열 하나 살리자고 대한민국 전체 국민의 정서를 거스를 수 있겠는가? 특히 트럼프 차기 대통령은 철저한 장사꾼이다. 무슨 득이 있다고 하겠는가?
두 번째는 '여야 합의'다. 하야하는 대신 여야가 합의로 윤석열 부부를 처벌하지 않는다는 '대국민 약속'을 하는 방법이 있다. 국회 결의안으로 통과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윤석열 김건희 부부의 성에 차지 않을 것이다. 혹시 몇 달 뒤 민주당이 정권을 잡으면 상황이 또 달라질 수 있어서다. 게다가 검찰과 경찰의 수사를 통해서 새로운 사실이 속속 드러나면 이 약속은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가 없어진다. 윤-김 부부는 더 확실한 것을 요구할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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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칼럼은 시민언론 민들레에 기 게재된 내용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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