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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더 이상 '119 민주주의'에 머물지 말자(1)

강민정 칼럼
전 국회의원
대한민국 시민은 위대했다. 총칼을 앞세워 헌법을 유린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세력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결정적 힘은 그들로부터 나왔다. 대한민국은 계엄군의 총구를 맨손으로 잡아채고 장갑차를 온몸으로 막아낸 위대한 시민을 보유한 나라다. 온갖 야비한 사술에다 주술마저 동원해 권력을 지키려던 이들의 결정적 패착은 이 위대한 시민의 힘을 우습게 보았다는 것이다.

이 위대한 시민에게는 국가 안위가 위협받는 때에는 만사 제치고 나서 목숨도 거는 DNA가 내장되어 있다. 멀리는 임진 의병에서부터 동학농민혁명군, 3.1 만세운동,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1987년 6월 항쟁, 2016년 촛불탄핵까지 면면히 이어지며 진화하는 DNA다. ‘과거가 현재를 살리고,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리는’ 일은, 달리 말하면 켜켜이 쌓인 수많은 눈물과 희생이 마치 땅속에 묻혀 새싹을 틔워 올리는 씨앗이 되었음을 말한다.

시민들은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 후 14일 국회 탄핵소추 의결이 이루어지는 열이틀 동안 열두 달치 에너지를 초집중시키기로 작정한 듯 움직여 민주주의 사수의 중대 고비를 넘었다. 그들이 쏟아낸 에너지는 가히 초인적이었지만 결코 비장하지 않았다. 매일 아침 집을 나서 직장에 출근하는 것처럼 자신의 마땅한 임무를 수행하듯 여의도 국회의사당으로 향했고, 휴대전화에서 눈을 떼지 않고 국회 상임위 중계와 다양한 뉴스들에 집중했다. 세계를 또 한 번 놀라게 한 축제 같은 항쟁을 만들어냈다.

‘민주주의 열매를 가만히 앉아서 따먹을 수는 없어 광장에 나갔다’는 어느 댓글에서 민주공화국의 진짜 주권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아마 우리나라 주권자 시민들은 윤석열 탄핵소추 의결이라는 한 고비만을 겨우 넘긴 지금, 윤석열 내란세력으로부터 공적 권력을 회수하는 그 순간까지 남아 있는 많은 일들 역시 당당히 감당해낼 것이다. 8년 전에도 이명박, 박근혜가 구성한 헌법재판소가 주권자들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고 결국 박근혜 파면을 선고했던 것처럼.

우리는 어제의 안도와 기쁨을 만끽하며 스스로를 칭찬하고 자랑스러워해도 될 충분한 자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번 친위 쿠데타 사태를 겪으면서 한편에서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렇게 위대한 주권자 시민들이 만일 12년 공교육 기간 동안 제대로 된 민주시민교육을 받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대한민국 시민성의 위대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치러야만 했고 또 치러야 할 비용은 너무 크다.

공동체의 위기를 기꺼이 직접 나서서 해결한다는 우리의 주권자 DNA는 역사가 배태한 일종의 유전적 요소다. 우리가 선택한 것도, 노력해서 얻어낸 것도 아니다. 위대한 조상들 덕분에 물려받은 DNA인 것이다. 그것은 소중하고 자랑스러운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5.18 광주, 6월 항쟁, 촛불탄핵과 같이 우리의 주권자 DNA를 만들어낸 ‘과거’로 인해 주권자인 우리 자신도, 우리 사회 민주주의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의 민주주의는 '119 민주주의'에 묶여 있다. 국난위기, 민주주의 위기 순간에 출동해 급한 불을 끈 후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 가는 민주주의, 그래서 치러야 할 고통의 비용은 크며, 무엇보다 다시 위기가 초래되지 않아도 될 체제를 만드는 구조적 개혁은 더디고 불안정함이 지속된다. 우리 사회, 특히 정치는 롤러코스트를 타는 듯 하더니 드디어 윤석열과 같은 극단적 통치 권력까지 허용했다. 무엇이 문제일까.

교육계에서 종사했던 사람으로서 이쯤에서 이런 의문이 생긴다. ‘좋은 DNA를 타고난 사람이 좋은 교육을 받는다면 얼마나 멋질까,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얼마나 안정적이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낼까’하는 생각. 물론 한 사회의 위기는 다양한 원인들이, 때로는 복합적으로 작용해 초래된다. 교육이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마술봉이 될 수는 없다는 점도 인정한다. 그러나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 교육이라는 점에서 정치인 수준도, 주권자 수준도 교육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점 또한 분명한 일이다.

물론 예전에 비해 제도권 교육인 공교육의 영향력이 작아지고 있다. 이는 IT기술과 다양한 정보네트워크로 인해 지식이나 정보 접근권이 혁명적이라 할 정도로 확대된 결과다. 이번 여의도 탄핵집회에서 등장한 발랄하면서도 유쾌한 축제 같은 집회문화가 만들어진 것도 그 산물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디지털 문화에 더 친숙한 젊은이들이 보여준 감동과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학습하고 각성하는 것을 각자의 몫에 맡길 것이 아니라 제도화된 학습을 통해 시행착오를 줄이고 더 나아갈 수 있다. 그것이 공교육의 역할이어야 한다.

공교육은 국민세금으로 이루어진다. 공교육이야말로 각 개인의 삶뿐 아니라 우리 사회가 건강한 민주사회가 되는 데 복무하는 것을 분명한 목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교육기본법 제2조는 교육목적으로 민주시민 자질 함양을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법전에 갇힌 교육목적이 아니라 구체적인 교육현장 안에서 살아있고 관철되는 교육목적으로 민주시민 자질 함양을 위한 공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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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칼럼은 시민언론 민들레에 기 게재된 내용임을 밝힙니다.
외부원고 및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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