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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속의 기억, 빛나는 소방

온종일 추적추적 내리던 장맛비가 잦아들고 그동안 어딨었는지 모습을 감추고 있었던 한 줄기 햇살이 내리쬔다. 하지만 이 빛은 아직 이곳을 완전히 감싸지 못한다. 한동안 불빛이 꺼질 새가 없었던 소방서에 잠깐 숨 돌릴 시간이 주어졌을 뿐이다.

이상 기온 현상으로 형성된 북태평양 고기압의 정체전선으로 인해 전례 없이 긴 장마가 이어졌다. 지난 6월 24일부터 내리기 시작한 장맛비는 예년이었으면 진작 무더위가 시작되었을 8월 중순에서야 그쳐가고 있다. 이미 50일을 넘어 역대 최장 기록을 경신한 이번 장마는 가히 기후 위기라 해도 될 법한 재난이었다.

불과 올봄까지만 해도 장마철에는 화재가 적어 소방서도 한층 한가하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는 오산이었고 지금까지의 의무소방 생활 중 가장 무거운 하루하루가 여름 내내 이어졌다. 서울 강남부터 국토 최남단의 부산까지 국토 전역에서 수해가 끊이질 않았고 일부 도시에는 특별재난지역이 선포되었다. 이는 곧 소방서가 쉴 새 없이 바빠진다는 의미였다. 익산이 속한 전북만 보더라도 남원 부근 섬진강의 제방이 무너져 대응 2단계가 발령되었다. 아침마다 익산에서부터 지원을 나가는 소방관들을 보고 있으면 알 수 없는 씁쓸함이 입안을 맴돌았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까지 있었다. 지리산 피아골에서 피서객을 구하려다 계곡물에 휩쓸려 순천소방서 구조대원이 순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안전 로프가 끊어진 것인지, 풀어진 것인지는 확실한 사고 경위 조사가 진행 중이라 알 수 없다. 그러나 충분히 준비, 개선이 이뤄질 수 있는 장비 때문에 타인의 생명을 구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지켜오던 자신들의 생명을 잃었다는 것에 대해선 자성이 필요하다. 이뿐만이 아니라 구조 차량이 침수되자 진입 여건을 확인하던 충주소방서 직원이 도로가 유실되며 급류에 휩쓸려 실종되는 일도 있었다.

계속해서 들리는 궂긴 소식에 단순 슬픔을 넘어선 감정이 생길 때쯤이었다. 인력 부족으로 주말에 갑작스레 우비를 챙겨입고 나갔던 배수 지원 현장에 도착해서야 이 위화감의 정체가 ‘자조감(自嘲感)’임을 알 수 있었다. 여관 지하 전체가 침수되고 수신기는 누전되어 비상벨이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신고자는 당장 일상이 위협받고 있지만, 소방은 물론이고 경찰, 시청까지 모든 관공서가 폭증하는 신고에 인력과 장비가 부족하여 신속한 해결이 어려웠다. 여기에 전기 설비 업체까지 연락이 되지 않아 비상벨 소리조차 끌 수 없는 상황, 아직도 재난 사태에서 협업 체계가 부족한 우리나라의 현실, 그리고 그 속에서 느껴지는 나의 무력함까지 많은 것이 원망스러웠지만, 동시에 잊고 있었던 것을 되찾을 수 있었다.

국민 안전을 위해 ‘침과대단(枕戈待旦)’과 ‘안거위사(安居危思)’의 자세로 밤낮없이 재난에 맞서는 사람들이 있다. 생명의 기운이 완연한 봄가을 푸른 하늘 아래에서 건조한 바람의 쌉싸름한 뒷맛을 씹으며 불길과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 장마와 태풍에 생명의 불길이 꺼지지 않도록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밤마다 창문을 두들기던 빗소리가 그치기 무섭게 찾아온 폭염을 이겨낼 채비를 하고 있다.

국민 안전이란 책임을 짊어지고 묵묵하게 앞으로 걸어가는 소방관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다시금 경의를 표한다. 익숙함과 당연함에 속아 잊고 있을 수 있는 사실이지만, 사시사철 365일 내내 불을 밝히고 있는 소방서 덕분에 우리의 일상이 환하게 비추어진다는 점을 모두가 기억해야 한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 말도 없이 젖어가는 우리 사이에서 묵묵하게 우산을 펴고 서 있는 소방관들. 이들이 흘린 땀과 눈물은 오늘도 땅을 적시고, 또 굳세게 만든다.

앞으로 비가 오는 날 밤이면 어두운 창밖을 보며 이들이 걷는 길, 아직 멀기만 한 그 길을 그려보고, 기억 속으로나마 함께 걸어보며 괜스레 드는 울적함을 달래볼 수 있을까.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익산소방서 의무소방원 상방 서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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