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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극우 기독교의 뿌리, 이승만을 캔다(1)

주진오 / 역사학자·상명대 명예교수

선교사가 설립한 배재학당을 졸업한 이승만은 1898년 만민공동회에서 연사로 나섬으로써 대중적 스타가 되었지요. 그는 1899년 1월 9일 박영효 역모사건으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런데 권총 탈옥을 시도했다가 붙잡혀 탈옥미수죄로 감옥생활을 했는데요, 그는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감옥 안에서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습니다. 도서관과 학교를 운영하였고 신문 기고와 번역서 발간도 가능했어요. 원고 집필도 할 수 있어 그의 대표 저작인 『독립정신』도 감옥에서 집필한 것입니다. 그는 1899년경에 기독교를 받아들였어요.

‘독립정신’에서 그는 서구열강의 정치제도를 수용하고 친밀한 외교를 주장했습니다. 그가 기독교를 받아들일 것을 역설한 이유는, 서양 국가들이 부강한 이유를 기독교에서 찾았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그에게 제국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은 없었습니다. 1908년 3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이 대한제국의 외교 고문으로서 일제 침략을 옹호해 왔던 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이승만에게 법정 통역을 요청했으나, "예수교인의 신분으로 살인재판의 통역을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절했어요. 오히려 그는 현지 한글신문이었던 에 기고하여, “감정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오히려 서구 국가를 적으로 돌리게 되어 그들이 일본과 더더욱 밀착해 일본을 도우는 꼴이며, 독립에 도움은커녕 해악이 된다”고 비판하였습니다.

그는 졸업 후 1910년에 귀국하여 YMCA에서 교육 활동을 하다가, 1912년 세계감리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출국했는데요, 하와이에서 『한국교회핍박』을 발표하여 일본에 대한 의열투쟁과 군사적 행동을 비판하면서 기독교를 통한 외교독립론을 주장했어요. 1925년 이승만의 국내 지지자들은 흥업구락부를 창립해서 일제가 허용한 범위 안에서 농촌사업을 진행했습니다. 1938년 흥업구락부는 대규모로 구속되어 해체되었는데, 검거된 회원들은 전향한 뒤 일제에 협력하였고, 단체의 모든 자산을 국방헌금으로 납부했어요.

그 후 신흥우의 주도로 「적극신앙단」이 결성되었습니다. 그들은 히틀러의 영향을 받아 미국식 민주주의와 고전적 자본주의 및 공산주의를 비판하였어요. 「적극신앙단」은 전체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의 이념적 좌표는 국가사회주의, 즉 파시즘이었습니다. 미국 유학을 거친 ‘친미파’ 상당수가 반미파, 곧 친일파로 변신하여 미국을 제국주의 국가라고 규정하고 백인사회와 선교사들의 인종차별을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대동아전쟁’은 동양인의 생존권과 자위권을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의 전쟁으로 규정되었어요. 해방이 되자 일본의 편에서 미국을 저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미국인과의 네트워크가 강력한 사회적 자본으로 급변하여 미군정의 특권적 일부로 편입되었습니다. “친미적이면서 반공적인 세력의 발견과 육성”이 필수적인 과제인 미군정과 자연스럽게 융합되었어요. 한국 기독교는 미군정을 지지했고, 가장 보수적인 이승만 진영을 압도적으로 응원했습니다. 좌익 세력과 무력충돌까지 서슴지 않았지요. 월남한 기독교인들이 주축이 되었던 서북청년단이 가장 대표적 사례였습니다.

미군정 및 이승만 정권 시기에 한국 기독교는 많은 후원과 특혜를 받았어요. ‘사실상의 기독교 국가’로 탈바꿈했고, 자유당은 ‘기독교 정당’으로 통념화 되었습니다. 고위 공직자나 국회의원 중에 개신교 신자의 비율이 비정상적으로 높았지요. 기독교를 나라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이승만은,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이윤영 목사에게 기도를 요청했어요. 미군정하에서 공휴일로 지내던 성탄절을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그대로 공휴일로 인정했습니다.

정치지형 변동의 종교적 결과로 “개신교의 급팽창”과 “종교시장 내 개신교의 점유율 확대”가 나타났지요. 1945년 당시 15만이 안되던 신자 수가, 1955년에는 100만 명을 돌파하여 불교에 이어 제2의 교세를 가진 종교로 급성장했습니다. 한국기독교교회연합회(KNCC)는 2대 대선에서 이승만 지지운동을 벌였습니다. “기독교계의 요청을 수용하여 국기경례를 주목례로 대신하도록 고쳤고, 군목제도를 설치했으며, 국가의식을 기독교식으로 지령하였다”고 설명했습니다. 1952년 정부통령선거에서 무소속 함태영 목사가 당선되었고 이기붕이 자유당의 제2인자로 떠올랐는데요. 개신교 인맥이 핵심 실세를 이루면서, 자유당의 지도자들 모두 개신교 신자들로 채웠습니다. 배은희는 장로교 목사, 이승만은 감리교 장로, 이기붕은 감리교 권사였어요. 1954년 12월 기독교방송이 개국했는데, 교회의 사회적 공신력을 높이고 교세를 신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리고 개신교와 천주교만의 참여로, 1951년 초부터 군종제도가 시행에 들어갔지요. 오로지 개신교에만 허용된 형목제도는 타 종교의 참여가 봉쇄되었습니다. 국가적인 장례식도 개신교 방식으로 진행되었어요. 기독교계는 한국전쟁 발발 이후에도 “국군장병의 ‘위령제’를 ‘추도식’으로 개칭할 것”, “‘충영탑’이란 명칭을 ‘기념탑’으로 변경할 것”, “‘33인 합동추념식’에서 ‘분향’을 실시하지 말 것”을 요구하였습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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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칼럼은 시민언론 민들레에 기 게재된 내용임을 밝힙니다.
외부원고 및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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