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윤석열, 무슨 상관 있는가? 2월 27일, ‘윤석열 폭정 종식 그리스도인 모임’은 성명서에서 그렇게 물었다. 성명서 내용을 요약하고 싶다.
“한국 개신교가 국민의 신뢰를 잃게 된 것은 복음 자체 때문이 아니고, 복음 정신을 망각한 개신교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위헌적인 비상계엄을 선포한 윤석열의 내란 범죄에 대해 명료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목사들이 적지 않고, 일부 목사들이 내란 수괴의 범죄 행위를 감싸며 온갖 거짓 선전과 선동으로 신자들을 미혹케 하였기 때문이다. 진실한 개신교인이라면 예수 이외 어느 정치가나 정치 집단에 궁극적인 충성을 바칠 수는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돈과 권력과 자기만족으로 바꾸라는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 사람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인 교회 공동체를 개인이 지배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충성이 아닌, 다른 정치인을 향한 헌신과 복종을 요구하는 것은 명백한 배교행위이다.”
“교회는 우리 것이 아니라 하느님 것인데, 우리들은 얼마나 자주 교회가 우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한탄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말씀이 떠오른다. 군중을 목자 없는 양처럼 측은히 여겨, 여러 가지로 가르쳐주었던 예수의 가르침(마가 6,34)을, 우리 이익에 유리하게 멋대로 왜곡하지 말고, 정직하게 알아들어야 한다. 돈 생각 먼저 하는 교회는 악마에게 무릎 꿇기 쉽다. 악마는 지갑 속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교회는 우리 것이 아니라 하느님 것이다. 항일 독립투쟁에 참여했던 지도자들은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 모여, 나라의 주인은 전체 조선 인민으로 하고, 나라는 ‘왕국’이나 ‘제국’이 아닌 ‘민국’을 만들기로 결의하였다.
1936년 2월 26일, 일본 장교들이 천황의 권한을 강화하여 일본을 강대국으로 만들자고 주장하며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들은 처단하기로 작정했던 인사들을 처형했지만, 대세를 장악하지 못했고, 일왕을 설득하지도 못하였고, 주모자 17명은 처형되었다. 윤석열 세력은 일본 장교들의 그 친위 쿠데타를 본땄을까?
그런데, 요즘 대한민국에 해괴한 유령이 떠돌고 있다. 유신 독재와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에서 대통령의 권력을 정당화하려고 사용된 ‘통치행위론’이란 이름의 이론이다. 대통령의 고도의 정치적 행위는 사법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악랄한 주장이다.
나치 독일 법학자들은 히틀러 총통의 행위는 법적 심사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논리를 개발하였다. 우리나라 민주화 과정은 그런 통치행위론과 결별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사악한 이론을 다시 꺼내어 윤석열 내란을 옹호하는 일부 학자들과 법률가들이 있다. 그들의 만행을 규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교 달력으로 사순절 또는 해방절 절기가 시작되었다. 로마 제국주의에 희생된 예수의 고난을 기억하고, 불의에 대한 저항을 특별히 다짐하는 시기다.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탈출하는 사건을 성서에서 읽으며 기억할 때, 고통과 폭력의 상황에서 벗어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더 나은 삶을 찾아가는 민주 시민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참으로 길을 걸어가는 중인가? 아니면 두려움과 실의에 빠져 옴짝달싹 못하거나, 안락한 곳에서 나오기를 꺼리며, 움직이지 않고 그저 가만히 서 있는가? 나는 죄의 유혹과 나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상황을 멀리할 방법을 찾고 있는가?… 역사적 사건들을 이해하게 해 주고, 정의와 형제애에 헌신하며, 우리 공동의 집을 돌보고, 그 누구도 소외감을 느끼지 않게 북돋워 주는 희망을 나는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있는가?”
역사 현실은 중앙에서가 아니라 주변부에서 보아야 더 정확히 잘 이해된다. 윤석열 내란 세력의 관점에서 현실을 볼 것이 아니라, 탄압받는 백성들 관점에서 현실을 보아야 한다. 역사의 모든 시대에는 죽음을 음모하고 인간의 얼굴을 파괴하고 훼손하는 폭군이 불행히도 존재한다. 우리 역사에도 악은 있지만, 악이 가장 강한 존재는 결코 아니다.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것은 매우 좋지만, 좋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아주 나쁘다. 내란 세력에 동조하지 않는 것은 아주 좋지만, 내란 세력에 맞서 싸우지 않는 것은 아주 나쁘다. 불의 앞에서 침묵하는 사람은 결국 악의 편이다. 시대의 비극 중 하나는 우리가 현실에 눈 감고 현실을 외면한다는 사실이다. 발코니에서 불의한 세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숨 쉬고 한탄하는 구경꾼이 되지는 말자. 악에 반대하고, 폭력에 반대하고, 억압에 반대하고, 타인을 위해 봉사하고 합법성과 공동선을 위해 살도록 용기를 가져야 한다. 먼지 자욱한 역사의 길 한복판에서 정의의 하느님이 용기를 주러 우리에게 오신다. 하느님은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키거나 구경하는 분이 아니다.
희망은 누룩처럼 작아 보이지만, 인간의 영혼을 크게 성장시킨다. 희망에 기초한 진정한 믿음에는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깊은 열망이 담겨 있다. 하느님의 희망은 인간이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5,5)
예수와 윤석열은 빛과 어두움의 관계다. 어두움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그러니, 윤석열 검찰독재 정권을 하루 빨리 몰아내고, 희망 안에서 용기 있게 함께 걷자. 온 세상의 꽃을 꺾는다 해도, 봄은 온다.
본 칼럼은 시민언론 민들레에 기 게재된 내용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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