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대 l 축소

악은 어떻게 내면화하는가?(2)

강수돌 / 고려대 명예교수

어쩌면 아이히만 등이 보인 이 ‘야누스의 얼굴’은 ‘평범인’의 전형이 아닌, ‘확신범’의 전형일지 모른다. 평범인이라면 인지 부조화 내지 언행 불일치 상황에서 수치심, 죄책감, 불편함을 느낀다. 그래서 침묵 속으로 숨거나 외면하려 한다. (엉터리이긴 하지만) ‘나름’의 일관성을 유지하려 애를 쓴다. 그러나 ‘확신범’은 다르다. 양심이나 상식에 어긋나는 생각과 태도, 행동을 오히려 합리화, 정당화, 적극 옹호한다.

최근 한국 상황에서 나온, “반국가세력 척결”을 위한 ‘계몽령’ 발언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면서도 현실에서는 좋은 이미지를 보이기 위해 평범한 척, 착한 척, 선행을 베푸는 척한다. 아이히만 역시 가축 돌봄 노동을 수행하고 음악을 즐기고 독서도 열심히 했다. 예루살렘의 재판정에서도 그는 ‘(저항 않는) 성실한 관료’로 위장했다. 그러나 그의 실상은 최후의 순간까지 나치즘을 신봉한 확신범이자 반성 없는 자기변호인(거짓말장이)에 불과했다. 심지어 그는 이마누엘 칸트의 ‘정언명령’까지 동원하며 자기 정당화에 진력했다. “나는 항상 칸트 철학의 애호가였으며, 정언명령에 따라 행동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칸트의 정언명령은 오히려 양심의 명령에 가깝지 파쇼의 명령은 전혀 아니었다! 그래서 슈탕네트는 말한다. 아이히만에게 재판은 ‘자신과 세상을 감쪽같이 속인 가면극이자 냉소적인 기만극’이라고! 그리고 바로 그 가면극 내지 기만극에 관찰자 아렌트 역시 속았다고!

따라서 슈탕네트의 ‘악의 확신성’ 개념 역시 타당하게 보인다. 알고 보니, 윤석열과 김용현, 김건희와 노상원, 일부 국힘당 의원이나 극렬 종교인 등, 계엄 주도 세력들은 이 명제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것 같다. 한편, 상당수 장군들과 국무위원들, 상당수 고위공직자들과 국힘 추종자들은 ‘악의 평범성’ 명제를 입증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이들은 대체로 마음속으로는 ‘아닌데…’ 하면서도 거부하기 힘든 ‘VIP의 의지’ 때문에, ‘눈 밖에 나기 두려워’, ‘보복을 당할까 겁이 나서’ 등의 이유로 반신반의하는 상태에서 끌려갔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묻는다.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도, 슈탕네트의 ‘악의 확신범’도, 나름 일리가 있다면 우리에게 남은 질문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해서 평범한 사람조차 악을 확신하게 되는가'라는 것이다. 요컨대, ‘악의 내면화’가 문제다. 이에 대한 내 나름의 사유 결과는 이렇다.

첫째, 가장 쉬운 설명은 ‘세뇌 효과’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어릴 때부터 사람의 두뇌와 생각을 국가 내지 특정 세력(교육, 언론, 종교)이 조작하는 것이다. 예컨대, 오늘날 우리가 칭송하는 독일의 킨더가르텐(유치원) 제도는 ‘원래’ 나치 시절에 국가가 (그리고 자본이) 아이들을 부모의 영향으로부터 분리하기 위한 시도에서 시작됐다. 거칠게 압축하면, ‘아이들을 부모의 오염된 가치관으로부터 보호하고 순수한 아리아족의 위대함을 고취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만3세 아동부터의 킨더가르텐 제도다. 또,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인의 혼을 개조하기 위해 ‘국민학교’를 세우고 그들이 만든 교과서로 국민교육을 해온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세뇌 교육의 수단은 ‘당근과 채찍’이다. 말 잘 들으면 당근을 주고, 아니면 채찍으로 때린다. 국가나 어른이 원하는 일을 반복하며 당근으로 보상을 거듭 받게 되면 그런 생각, 느낌, 태도, 행동은 습관이 된다. 세뇌의 결과 낯선 규범이 습관으로, 나아가 그것이 상식으로 신념화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성장한 아이들이 일정 시점에서 ‘근본적 성찰’의 계기를 갖지 못하면 세뇌된 상태로, 그것이 옳다는 확신으로 살아간다. 악의 내면화’는 이런 식으로 이뤄진다!

아이히만은 1957년 9월, 한 ‘원탁 모임’에서 “우리가 1030만 명 유대인 중 (600만이 아닌) 1030만을 죽였다면 매우 만족스러웠을 것이고 (…) 우리 피와 민족에 대한, 또 민족의 자유에 대한 우리 의무를 완수했을 것”이라 했다. 이런 신념을 그는 일찍부터 갖고 있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아무 ‘근본 성찰’의 기회가 없다면 ‘악의 내면화’는 일사천리다. 그런데 독일의 경우 그런 근본 성찰은 ‘유럽의 68 혁명’을 계기로, 한국의 경우엔 ‘대학 신입생 시각 교정’을 계기로 상당 정도 이뤄졌다. 물론, 지금의 일상에서도 교양도서나 꾸준한 인문학 모임을 통해 그런 ‘근본 성찰’은 얼마든 가능하다.

반면, 이 근본 성찰의 기회가 없다면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어른 아이’가 된다. 인생 마지막 순간에도 인생의 의미조차 모르기 일쑤다. 그저 생존했고, 재산을 모았으며, 국가에 충성했고, 내 새끼 남기고 갈 뿐! 요컨대, ‘세뇌-습관-상식화’의 경로가 ‘악의 내면화’를 낳는다. 둘째, 이해관계 내지 이해득실 계산법에 따른 ‘악의 내면화’다. 세뇌되어 성장한 사람조차 일정 계기에 직면해 ‘국가에 속았다’, ‘언론에 속았다’ 또는 ‘사람에게 속았다’는 생각이 들면서(현타=현실 자각 타임), 결국 ‘돈이 최고’라 느끼게 된다. 크게 보면 이것은 ‘등가법칙의 효과’다. 즉, 인간적 유대감에 기초한 공동체가 해체될수록, 그리하여 우리의 일상생활 전반이 상품-화폐 교환(등가법칙)에 지배될수록, 이런 실리주의가 팽배하게 된다.<계속>


*  *  *
본 칼럼은 시민언론 민들레에 기 게재된 내용임을 밝힙니다.
외부원고 및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전화면맨위로

확대 l 축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