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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은 어떻게 내면화하는가?(3)

강수돌 / 고려대 명예교수

대체로 우리는 부모의 품을 떠나 살게 될수록 ‘가혹한’ 현실을 경험한다. 돈이 없으면 세상은 매우 비참하다. 방 한 칸 얻는 것도 돈이요, 지하철 하나 타는 것도 돈이다. 이것이 현실이다. 돈이 많으면 사람처럼 살겠는데, 돈이 없으면 노숙자나 거지가 된다! 그리하여, 세상에 믿을 건 하나도 없는데, 심지어 부모조차 믿기 어려운데, (밖에 나가면) 오로지 돈만이 힘이고 권력이고 말빨(!)임을 반복 경험, 체험한다. 상품, 화폐,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이러한 경험은 더 이상 예외가 아니라 평범한 현실, 일상의 법칙이 된다.

이제부턴 삶의 의미나 존재, 인간관계, 자연관계 같은 건 위선이나 사치에 불과하고 오로지 ‘돈 되는’ 것만 가치 있게 보인다. 그리하여 특정 종교나 집단이 ‘돈 되는’ (밥 주는) 주장을 한다면 자연스럽게 끌려 들어간다. 한두 번, 그리고 두세 번 ‘실제로 돈 되는’ 경험을 반복하게 되면 ‘이것!’이란 확신을 한다. 최근 독일 총선에서 극우파 정당(AfD)이 20% 이상 득표한 것도 이런 맥락이며, 한국에서 극우 종교, 극우 언론, 극우 정치의 동맹체가 출현하고 있는 현상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요컨대, 이는 ‘현타-실익-소신화’의 경로다. 그 결과 자신도 모르게 ‘악의 내면화’가 이뤄지고 (백골단 부활이나 법원 폭동, 헌재 폭파 주장에서 드러나듯) ‘악의 확신범’이 된다.

셋째, 이와 연관되면서도 좀 다른 측면에서 ‘악의 내면화’를 볼 수 있다. 그것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폭력을 반복 경험한 결과 ‘트라우마’에 찌든 사람들이 나름의 생존전략으로 ‘강자동일시’ 심리를 수용한 결과라는 것! 앞에서 국가나 자본은 아이들을 일찍부터 세뇌하려 함을 보았다. 그러나 성장하는 아이들이 늘 순종하는 건 아니다. 일탈 내지 저항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이 한두 차례 저항을 했다가도 거듭 패배하고 좌절하면 결국엔 죽음, 배제, 탈락, 낙인의 두려움(공포)을 감당하지 못하고 생존을 위해 주체성과 저항을 포기한다. 체제 전반의 차원이건 개인적 차원이건 ‘강자동일시’가 일어난다. 비판자나 저항자들을 척결하면서 승승장구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유일한 것으로 여기거나, 자기가 아는 성공자, 출세자를 마치 자신과 한 몸처럼 여기는 것이 모두 ‘강자동일시’다. 그 한 결과가 ‘악의 내면화’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해 보자.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 개념을 내세우며 대량학살(홀로코스트)을 수행한 아이히만이 ‘별 생각 없이’ 국가와 조직에 충성하고 복종했으며 성실했을 뿐이라 했다. 반면, 아렌트보다 60년이나 젊은 베티나 슈탕네트는 ‘악의 확신성’ 가설을 제시, 아이히만이 인종주의 내지 반유대주의를 상식화, 소신화, 신념화했다고 본다.

아렌트에게 키워드는 ‘무사유’ 즉, 생각 없음 내지 피해의식의 위험함이다. 피해의식 뒤로 숨는 ‘피해자(희생자) 코스프레’는 무사유 외에 무책임을 드러낸다. 이는 최종적으로 무자비한 행동을 정당화한다. ‘~척 하는’ 피해자가 책임 전가를 통해 가해자로 둔갑하기 때문! 아이히만도 사형 직전의 법정 최후 진술에서 “나 역시 일개 희생자”라 했다. 원래 국가 폭력의 희생자조차 (어느 순간엔) 양심적 거부 행위를 할 수 있는 능동적 주체가 되기도 한다.

반면, 슈탕네트에게 키워드는 ‘신념화’ 즉, 외적 가치의 내재화다. 그야말로 일반인이 보기에 비인간적이고 반민주적인 것(예, 인종주의나 이기주의)도 이들에겐 소신 내지 행동 규범이 된다. 외적 가치를 내적 가치로 내재화한 상태이기에, 이 둘 사이의 경계가 더 이상 명확하지 않다. 따라서 이들 논리 안으로 들어가 보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오히려 책임의 주체(예, 유대인이나 굼뜬 자는 사회의 장애물)로 둔갑한다. 그리하여, ‘희생자 나무라기’ 또는 ‘희생양 찾아내기’가 예사로 행해진다.

일단 겉으로는 이 두 학자들의 명제가 서로 공통점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두 명제 모두 ‘성찰의 부재’란 공통점을 내포한다. 악의 평범성도, 악의 확신성도, 성찰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성찰이 없다면 아무리 평범한 사람이라도 쉽게 악인이 된다. 성찰, 그것도 ‘근본 성찰’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최근 한국의 계엄 사태와 관련해서도, 또, 지금의 전 지구적 기후위기와 관련해서도, 나는 이 근본 성찰의 부재가 존속하는 한 특정 개인(들)의 죽음은 물론, 한 나라, 한 사회, 나아가 지구 전반의 죽음을 피하기 어려울 거라 본다. 특히, 나치 파쇼주의나 반유대주의, 인종주의, 반공주의, 흑백논리, 가부장주의, 생산력주의, 능력지상주의, 성장지상주의를 체계적으로 부채질하는 자본주의 사회경제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인간다운 삶’을 위해 절박하고도 긴요한 시점이다.

아이히만은 죽기 전 이스라엘 감옥에서 자신을 “계몽주의와 세계주의를 갈망하는 평범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포장했다. 최근 12‧3 비상계엄과 관련, 윤석열은 “(야당인) 민주당의 폭주를 알리기 위한 경고성 계엄”이라 하며 ‘계몽령’이란 말까지 간접 창조했고, 김계리 변호사는 “나는 계몽 되었다”고 했다. 이들의 최후 진술과 아이히만의 최후 진술 사이에 무엇이 다른가?<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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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칼럼은 시민언론 민들레에 기 게재된 내용임을 밝힙니다.
외부원고 및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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