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도 대한민국은 여기까지 왔다. 일제 강점에서 벗어나자마자 국토와 국가가 남북으로 찢어졌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민족까지 갈라졌다. 독재와 부패가 판치는 세계 최빈국이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폐허에서 출발해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고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다. 코로나19 대유행 때는 세계의 모범이었고 지금은 영상예술과 대중음악으로 세계시민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있다. 국민은 윤석열 같은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을 정도로 변변찮았고, 권력 엘리트는 비루하게도 헌법보다 자기 이익을 앞세우는데, 어떻게 대한민국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변변치 않은 우리에게 대단한 그 무엇이 있어서다. 수많은 시민들이 계엄의 밤에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온 무장 군인들을 맨몸으로 막아섰다. 시민들만 대단했던 게 아니다. 어떤 지휘관은 자신의 부대가 한강을 건너지 못하게 했다. 어떤 경찰 간부는 계엄사의 정치인 체포조 파견 요청을 거절했다. 그랬기에 야당 국회의원들은 국회의 담을 넘어 본회의장에 들어갈 수 있었고 일부 여당 국회의원들과 함께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을 신속하게 의결할 수 있었다. 헌법재판관들은 전원일치 의견으로 이 사실을 들어 ‘호소용 비상계엄’이었다는 윤석열의 궤변을 단호히 배척했다. “국회가 신속하게 비상계엄 해제 요구를 결의할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 덕분이었으므로, 이는 피청구인의 법 위반에 대한 중대성 판단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때문’이 아니라 ‘덕분’이었다고 했다. 단순히 인과관계를 밝힌 것이 아니라 가치판단도 한 것이다.
그렇다, 우리한테는 대단한 면이 있다. 수십 만 시민들이 형형색색 응원봉을 들고 집결한 가운데 국회는 대통령 탄핵안을 처리했다. 검찰과 공수처와 경찰은 국방부 장관과 방첩사령관 등 내란 주요 임무 종사자들에 이어 수괴 윤석열을 구속 기소했다. 어떤 군인은 헌법재판소에서 내란의 실상을 있었던 그대로 증언했다. 어떤 판사는 야당 지도자 이재명에게 터무니없는 논리로 징역형을 선고했던 1심 판결을 뒤집어 완전 무죄를 선고했다. 시민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헌법재판소 근처에 모여 윤석열 파면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헌법재판관들은 완벽한 전원일치 평결로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할 수 있었다.
우두머리와 주요 임무 종사자들을 법에 따라 처벌하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공범과 잔당을 마저 찾아내 책임을 묻는 작업이 남아 있지만 내란의 불길이 되살아날 위험은 사실상 사라졌다. 대단하지 않은가. 한국의 권력 엘리트가 모두 시시하고 변변찮은 것은 아니었다. 사명감과 애국심과 결단력과 능력을 가진, 헌법에 충성하고 국민을 섬기려 하는 엘리트다운 엘리트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했다.
국민도 그렇다. 아무 국민이나 다 현직 대통령의 쿠데타를 막아내는 건 아니다. 친위 쿠데타가 실패한 경우는 세계 역사에 드물다. 우리 국민은 2022년 5월 잘못 판단해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뽑았고 6월에는 여당에 지방선거 승리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자신이 한 선택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성찰했다. 대통령 직무 수행 지지율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윤석열에게 경고 신호를 보냈다.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더 강력한 경고를 했는데도 민심을 무시하자 총선에서 역사상 없었던 참패를 안겨주었다.
그것이 마지막 경고였다. 윤석열은 그마저 무시하고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자 시민들은 몸으로 국회를 지켜 계엄해제 요구 의결을 하게 했고 압도적 여론을 표출해 국회의 대통령 탄핵을 끌어냈다. 넉 달 동안 쉬지 않고 모여 행진하면서 헌재의 파면 결정을 압박했다. 우리들 각자는 변변치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용기를 내고 뜻과 힘을 모으면 대단한 일을 해낼 수 있다. 우리는 그렇게 여기까지 왔고, 또 그렇게 해서 앞으로 더 멀리 나아갈 것이다.
우리는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뽑은 것과 같은 오류를 앞으로 또 저지를지 모른다. 그러나 그때도 이번처럼 스스로 잘못을 바로잡을 것이다. 나 혼자 한 생각이 아니다. ‘내란성 불면증’에 시달리면서 1859년에 나온 『자유론(On Liberty)』을 읽고 또 읽었다. 존 스튜어트 밀은 거기에 마치 우리 국민에게 건네는 듯한 말을 써놓았다. 윤석열의 대통령 당선부터 파면까지, 화나고 아프고 어이없는 일들을 견디고 이겨낸 시민들에게, 계엄의 밤 국회에서 계엄군을 막아섰던 사람들에게, 남태령의 기적을 만든 젊은이들에게, 눈보라를 맞으며 헌법재판소 앞에서 밤을 지샜던 남녀노소에게, 무한히 큰 감사의 마음을 얹어 그 말을 전하고 싶다. 밀은 우리 국민들이 ‘인간의 모든 자랑스러운 것의 근원’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스스로 자랑스러워 해도 좋다는 것이다.
“인류가 발전시켜 온 생각과 일상 행동의 역사를 보면, 인간 정신의 어떤 특징 덕분에 우리의 삶은 더 나빠지지 않고 지금 상태로나마 유지될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잘못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다. 사람은 경험과 토론으로 자신의 과오를 바로잡을 수 있다. 지적(知的) 도덕적 존재인 인간의 자랑스러운 모든 것은 여기에서 나온다.”<끝>
본 칼럼은 시민언론 민들레에 기 게재된 내용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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