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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복 속 허수아비들 - 그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김관춘 / 논설위원

2024년 12월 3일, 대한민국의 헌정질서는 실질적으로 무너졌다. 내란수괴 윤석열이 ‘친위쿠데타성’ 계엄령을 전격 발표하던 그 시각, 국민은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가 허망하게 무너지는 광경을 TV 생중계를 통해 목도했다. 이후 123일, 혼란과 저항, 탄핵 인용이라는 극한의 정치적 격변 속에서 우리는 확인했다. 거기에 사법부는 없었다. 아니, 법복을 입은 관료는 있었지만 ‘정의’와 ‘헌법 수호’라는 사법의 본령은 실종 상태였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국회가 자칫 무력화될 위기를 맞았고 그러면서 국민 기본권이 짓밟힐 수도 있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직면하고 고무줄 법 적용이 횡행하는 와중에도 사법부는 침묵했다. 사법부 수장인 조희대 대법원장은 불법 내란 사태에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암묵적, 심정적으로 악의 편에 동조하는 듯한 언행을 일삼아 국민을 좌절시켰다. 대한민국 사법체계의 최고책임자가 헌법 유린 사태에 대해 아무런 입장도 밝히지 않았다는 이 사실은, 단순한 직무유기를 넘어 사법부 전체의 존재 의의를 무화시킨 중대한 사법적 배신행위다. 국민들은 묻고 묻고 또 물었다. 사법부는 정녕 누구를 위해 존재하고, 그리고 왜 존재해야 하는가?

우리 공동체를 운영하는데 핵심 가치이자 근간인 법의 존재 목적은 궁극적으로 권력의 자의적 행사를 견제하고,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 있다. 그런데 2024년 겨울, 사법부는 이 모든 사명을 집단적으로 몰각했다. 아니, 망각한 ‘척’했을 것이다. 그들은 '법대로 하겠다'는, 언필칭 가치 중립적이고 엄정해 보이는 구호 뒤에 몸을 숨겼다. 그러나 실상은 '법대로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 시기의 사법부는 기묘한 철학에 발 딛고 있었다. “법은 살아 있는 권력 앞에서만 살아 있다”는 신념 말이다. 계엄령의 위헌 여부조차 외면하고, 대통령의 직무 정지 이후 벌어진 초법적 행위에 대해서도 입을 닫은 이들은, 마치 자신들은 정치를 초월한 고결한 사제계라도 되는 양, 고고한 침묵을 이어갔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침묵은 곧 권력의 편들기이며, 불의에 대한 방조다. 그것은 곧 공범이다. 불의 앞에 중립이 과연 있는가 말이다. 사법부는 ‘개 닭 보듯’ 국민의 저항과 외침을 내려다보았다. 칼바람 속에서도 전국의 광장에서, 거리에서 울리는 ‘헌법을 지키라’는 외침은 사법부 청사까지 닿지 않았던 것인가? 아니면 애써 듣지 않기로 했던 것인가? 더욱 충격적인 것은 내부 자정 기능의 완전한 실종이다. 지귀연 판사의 괴상하고 괴랄한 판결이 사회적 분노를 일으켰을 때, 사법부는 집단적으로 외면했다. 자율적 통제는 없었고, 후속 조치도 없었다. 내란수괴를 자신만의 기상천외한 법 해석으로 탈옥시켜 위법을 저지른 판사가 다시 내란수괴를 재판하고 있는 형용모순의 블랙코미디를 국민들은 지금 지켜보고 있다. 그러한 재판마저도 외관을 공정하게 갖추지도 않고 비공개, 비노출로 진행하고 있다. 국민의 알권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사법부는 이미 기능을 상실한, 법복을 입은 관료 집단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보았다. 고작 800원을 횡령한 버스 기사에게 엄격한 법의 잣대를 들이대며 실형을 선고한 판사가 헌법재판관에 지명되는 상식 파괴적 현상은 또 얼마나 희극적인가? 800원, 2400원에 분노한 정의감은 계엄령 선포에는 침묵하고, 평범한 시민의 일상에는 칼날처럼 날을 세운 판결들이 정녕 대한민국 사법부의 윤리인가?

조희대 대법원장은 그 어떤 정치적 책임도 지지 않는다. 단지 임기를 채우고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모든 책임이 사라지는 풍토, 헌법을 수호할 책무를 가진 자가 헌법 파괴의 순간에 침묵했고 그 침묵은 곧 행정부의 폭주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는 사법적 나태를 넘어서 민주주의 파괴의 간접적 조력 또는 공모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사법부는 정치적 중립이라는 외피 속에서, 사실상 정치의 하위기관으로 전락했다. 권력자의 눈치를 보며 민심보다 권력의 입김에 귀를 기울이는 이 모순의 구조 속에서 과연 ‘공정한 재판’이라는 이상은 얼마나 살아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지금의 사법부는 정의보다 ‘정권’을 더 두려워하는 집단으로 전락했다.

우리는 다시 한번 묻는다. 사법부가 침묵하고 외면한다면, 권력의 편에 선다면, 삼권분립은 왜 존재해야 하는가? 입법이 왜곡되고 행정이 전횡을 일삼을 때 이를 견제하지 않는 사법부는 그 자체로 역사 앞에 죄를 짓는 것이다. 침묵한 자는 단순한 방관자가 아니다. 그들 역시 공범자다. 역사는 2024년 겨울을 기억할 것이다. 국민이 거리에서 응원봉을 들고 북풍한설 눈 내리는 밤을 꼬박 새우며 분노로 맞서던 그 시기에, 사법부는 안온한 공간의 커튼 뒤에 숨어 있었음을. 법정에서는 사소한 잘못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칼날을 휘두르던 이들이, 정작 헌법의 생명이 무너지고 흔들리는 순간에는 깃털처럼 가벼웠다는 사실을. 그래서 언젠가 다시 헌정질서를 논할 때, 역사는 반드시 이 질문을 던질 것이다. 그들은 대체 어디에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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