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11월, 우금치. 혹한의 추위 속에서 전봉준 장군이 지휘하는 동학농민혁명군은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에 둘러싸였다. 1차 봉기 때와 달리 신식 총포로 무장한 연합군에 비해 농민군은 화력 면에서 크게 열세에 있었으므로, 개혁에 대한 열망만으로 전력의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반봉건과 반외세를 기치로 일어난 농민의 꿈은 그해 겨울, 우금치 고개를 넘지 못하고 쓰러졌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집권한 3년 동안 대한민국은 실로 모든 계절이 겨울이었다. 민주적 질서는 무너지고, 정치 갈등은 날로 첨예해져만 갔다. 2021년 10위에 자리했던 국가별 GDP 순위는 12위로 두 단계 하락했으며, 1,200원을 넘지 않던 달러 환율은 1,400원대 후반까지 무섭게 치솟았다. ‘IMF 때 같다’, ‘코로나 때보다 어렵다’는 자영업자들의 탄식은 더 이상 뉴스거리조차 되지 못했다. 이태원 참사를 비롯한 크고 작은 사고와 그에 대한 중앙 정부의 미흡한 대처는 유·무형의 신뢰 자본을 크게 훼손했다. 발전 동력을 상실한 사회는 점차 얼어붙어 갔다.
국정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고 방기했음에도 자리를 보전하는 데 급급했던 윤석열 전 대통령은, 그리스 신화의 자기실현적 예언처럼 자신의 판단과 선택으로 스스로의 파멸을 앞당겼다. 계엄의 밤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오히려 선명한 기억으로 남았다. 비상계엄 선포 소식에 놀란 시민들은 즉시 국회로 달려 나왔다. 시민들이 맨몸으로 군인과 장갑차의 진입을 막아내는 사이, 국회의원들은 담장을 넘어 국회 안으로 들어가 가까스로 계엄을 해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날 밤의 어둠을 완전히 몰아내기까지 이후로도 얼마나 지난한 과정들을 견뎌내야 했는지, 이제 우리는 알고 있다.
2024년 12월, 남태령. 전봉준 장군의 이름을 잇는 시위대가 트랙터를 이끌고 서울로 향했다. 대통령의 퇴진 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호남과 영남에서 상경하던 행렬은 남태령 고개에서 경찰의 버스 차벽에 가로막혔다. 교착 상태에 빠진 남태령의 겨울밤은 길고 무거웠다. 마치 130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우금치 고개가 현대에 재현된 것만 같았다. 그러나 결과는 그때와 달랐다. 시위대에 힘을 보태기 위해 시민들이 가세해 함께 밤을 지새웠다. 밝아오는 여명과 함께 차벽이 열렸고 시민들은 승리했다. 민주주의의 꿈은 남태령 고개를 넘어 광장으로 향했다. 대통령의 파면이 선고되기까지 120여 일 동안 광장의 밤은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응원봉의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탄핵은 끝이 아닌 시작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지난 3년 동안, 혹은 그 이전부터 억눌려 왔던 여러 문제들이 일제히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날이 갈수록 격화되던 진영 논리는 극단적인 대립으로 치달아 서부지법 점거 폭동과 같은 폭력 사태까지 이어졌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임명했던 고위공직자들은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 통제를 벗어나 헌법을 무시하고 행정을 제멋대로 처리하고 있다. 검찰과 법원은 상식에서 벗어난 결정을 수 차례나 내림으로써 사법 체계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를 무너트렸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권력의 무대에서 내려왔음에도 내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사람들은 이제 탄핵 국면이 지나갔으니 통합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통합은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꼭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표면적인 통합을 위한 미봉책에 그쳐서는 안 된다. 프랑스의 대문호 알베르 카뮈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부역자 청산을 주장하며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통합된 대한민국은 관용으로 건설되지 않으므로, 통합은 내란의 종식과 치유보다 우선될 수 없을 것이다. 다양한 의견을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다. 그러나 그 자체로 헌법에 반하고 민주주의를 부정하려는 의견은 통합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이 자명하다. 후과를 남기지 않으려면 통합의 시기와 방법을 정하는 데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다시, 대한민국의 시간이 움직이려 한다. 예기치 않게 다가온 조기 대선 정국에서 차기 정부는 100조 원에 달하는 나라빚과 더불어 사회 개혁, 국민 통합과 같은 어려운 숙제들을 떠안게 되었다. 우리가 멈춰 있는 동안에도 세계는 바쁘게 움직여 왔다. 미국의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광범위한 관세 정책을 발표했고, 러시아는 전쟁을 지속하고 있으며, 중국은 미국과 대립하여 부상하는 등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하루 빨리 발을 맞춰야 한다. 그러나 한민족은 어려운 시대일수록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왔던 저력을 지니고 있다. 130년 전에는 넘지 못했던 개혁의 고개도 끝내 넘어서 보이지 않았던가. 민주공화국의 주권자로서 나라의 운명을 결정할 시기가 조금 빠르게 돌아왔다. 대한국민의 위대한 선택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