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중 간 경쟁과 대결이 심화하면서 양측은 한국에 대해 상당한 선택압력을 가하고 있고, 이로 인해 한국 외교의 자율성이 크게 위축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미, 중 양국의 선택압력에 대해 한국이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방식만으로는 우리의 국익을 온전히 지켜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슈의 성격에 따라서는 미-중 양국 사이에서 적극적 중재나 독립적인 문제해결 방안을 제시하려는 노력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
미-중 사이에서 순응적 타협외교가 아닌 적극적 중재자 외교를 모색하는 것이 선택압력을 오히려 완화하는 방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하는 거친 외교 행태와 기존 국제질서 규범의 파괴에 직면해서는 더욱 그렇다. 예컨대 미국이 대중국 견제를 위해 추진하는 ‘쿼드+ 협의체’나 ‘칩4 동맹’에 한국의 참여를 압박할 경우 이를 끝까지 거부하기는 쉽지 않다. 주한미군 감축 등 안보이슈와 연동시키면 한국의 선택지는 거의 없게 된다. 이 경우 한국은 중국을 향해 이들 기구에 불가피하게 참여하지만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중국의 불만과 압박을 완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아이디어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이보다 덜 민감하면서 중재자로서의 실재적 역할이 가능한 이슈에서 시범효과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 트럼프 취임 이후 크게 흔들리고 있는 글로벌 공급망 관리, 국제 무역질서 규범, 기후변화 규범, 각종 다자기구 등 글로벌거버넌스 체계의 안정화, 그리고 최근 새롭게 부상하는 이슈인 AI 거버넌스 규범 등의 이슈에서 한국이 보다 주동적이고 창의적인 개입을 통해 중견국으로서의 글로벌 중재자 역할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당장 10월 말 경주에서 개최되는 APEC 회의도 이를 실현하는 좋은 무대가 될 수 있다.
한국이 교량국가로서 중재자 외교를 추진하는 데서 주목해야 할 외교무대가 글로벌사우스 진영 및 이들이 참여하는 국제 다자기구다. 최근 국제질서는 전통적 선진국의 주도권이 상대적으로 약화하는 틈새를 글로벌사우스 진영이 빠르게 파고들면서 발언권과 영향력을 강화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다극화와 불확실성이 심화되는 세계질서 속에서, 글로벌노스와 글로벌사우스 양 진영의 정체성을 모두 지닌 한국은 양측을 연결하는 교량자·중재자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다.
특히 한국은 성공적인 산업화와 민주화, 그리고 선진국으로의 전환을 동시에 이룬 국가로서, 많은 개발도상국이 모델로 삼고자 하는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의 외교적 시야는 다소 협소했으며, 중간지대 국가로서 지닌 정체성과 역량을 대외전략에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 K-이니셔티브는 이러한 잠재력을 발현시킬 수 있는 기획이 되어야 한다.
지난 10여 년간 글로벌사우스 국가들과의 외교에 가장 많은 자원을 투입한 국가는 단연 중국이다. 중국은 일대일로(BRI), 글로벌개발이니셔티브(GDI), 글로벌문명이니셔티브(GCI) 등 다양한 구상을 통해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구축했다. 하지만 동시에 다수 개발도상국에서 중국에 대한 정치적 신뢰와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중국 역시 이 같은 한계를 인식하고 있으며, 이를 보완할 협력 파트너로서 한국을 주목하고 있다. 글로벌사우스 국가들과의 경제 및 전략적 협력에 있어 한·중이 보완적 파트너십을 구축할 여지가 크다는 것이다.
사실 미·중 간의 경쟁 구도와 글로벌 사우스-글로벌 노스 간의 대립 구도에서 한국이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중국이 내심 기대하는 바이기도 하다. 중국은 지난 10여 년간 미국과의 패권 경쟁을 본격화해왔지만, 동시에 힘의 열세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과의 직접 충돌을 피하며, 이른바 ‘회색지대 전술’을 통해 장기간에 걸친 점진적인 영향력 확대를 꾀하고 있다.
이러한 전략의 연장선에서 중국은 미국과의 정면 대결보다는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며, 양자 관계의 안정적 관리를 선호한다. 미국 및 글로벌 노스 진영과 안정적 관계를 유지하고 긴장을 완화하는 데 있어, 때로는 제3국의 적절한 중재가 효과적일 수 있다. 중국이 볼 때 한국은 서방과 중국 양측의 입장에 상당히 정통하면서, 중재자 역할을 수행할 만한 역량을 갖춘 매력적인 국가다.
K-이니셔티브를 외교 분야로 확장하기 위해서는 중간지대 국가로서의 한국의 정체성과 역량에 기반한 주체적이고 창의적인 외교 발상이 요구된다. 한중 간의 갈등 이슈들은 겉으로는 양자 간 이슈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미중 전략경쟁과 같은 다자적 갈등 구조의 산물인 경우가 많다. 이는 한중관계의 미래를 양자 간에 단순한 교류 확대나 협력 강화만으로는 설계하기 어렵다는 점을 시사한다.
한국은 미·중 사이에서, 그리고 불확실성이 심화된 글로벌 규범과 거버넌스의 재편 과정에서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교량자이자 중재자로서의 외교적 역할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야말로 한국의 국익을 증진하는 동시에, 한중 양국이 미래를 함께 설계해나가는 친구이자 동반자로 거듭나는 첩경이 될 것이다.
본 칼럼은 시민언론 민들레에 기 게재된 내용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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