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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사회에 되살아난 19세기식 힘의 질서(1)

김종대 / 국방전문가·전 국회의원
2025년 8월 알래스카에서 벌어진 트럼프-푸틴 정상회담은 단순한 평화 협상을 넘어 국제질서의 근본적 변화를 상징하는 분수령이 되었다. 우크라이나 전쟁 종료를 위한 이들의 협상안은 표면적으로는 평화를 추구하는 듯 보이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알던 전후 국제질서의 원칙들이 얼마나 급격히 퇴색되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트럼프가 푸틴의 조건부 평화안에 ‘상당 부분 동조’했다는 평가는 충격적이다. 돈바스 지역 전체를 러시아에 공식 양도하라는 요구에 사실상 응한 것은 유엔헌장과 국제법의 핵심 원칙인 영토 보전과 주권 존중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행위다.

과거 냉전 시대에도 강대국들은 세력균형을 위해 때로는 약소국의 이익을 희생시켰지만,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국제법과 도덕적 명분을 중시했다. 하지만 이번 협상안은 그런 가면마저 벗어던진 채 노골적인 힘의 논리를 전면에 내세웠다. 푸틴이 “문서로 보장하겠다”고 한 약속이 얼마나 공허한지는 2014년 크림 병합과 2022년 전면 침공의 역사가 증명한다. 트럼프가 우크라이나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준하는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에 외국군 주둔을 말한 것 역시 실효성에 의문이 있다. 결국 푸틴과 트럼프라는 믿을 수 없는 두 지도자가 평화를 정착시킬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명분과 원칙만 고집하며 무한정 전쟁을 지속시키는 데 대한 반발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막대한 전비 부담으로 피로해진 유럽 국가들이 트럼프의 평화 협상안을 환영하고 나선 것이 그런 배경이다. 트럼프-푸틴 협상안이 보여준 국제질서의 변화는 우리에게 쓰라린 현실을 일깨워준다. 강대국들이 약소국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19세기식 힘의 외교가 부활하고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의 접근법에서 가장 우려스러운 점은 미국이 세계와 동맹국에 대한 책임을 집어 던지고, 자신들이 주도해 온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토대를 스스로 흔들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미러 정상회담은 규칙 기반 질서에서 힘 기반 질서로의 전환이 가속화되는 징후다. 국제법과 다자기구의 권위는 추락하고, 강대국 간의 직접적 협상과 거래가 국제 문제 해결의 주요 수단으로 부상하고 있다. 동맹 체제의 재편도 불가피해 보인다. 미국의 일방적 결정에 반발한 유럽 국가들은 전략적 자율성을 더욱 추구할 것이고, 이는 서방 동맹의 결속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 지역 패권국의 영향력 확대도 주목할 변화다. 러시아, 중국과 같은 지역 강국들이 자신의 세력권 내에서 갖는 발언권이 강화되고 있으며, 이는 중소국들에게는 더욱 제한된 선택권을 의미한다. 우리나라는 이번 사태에서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어야 한다.

먼저 자주국방 능력의 중요성이다. 외부의 안보 보장에만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우크라이나 사태가 보여주고 있다. 강력한 자체 방어력 없이는 종이 위의 어떤 약속도 무의미할 수 있다. 강대국 정치에 함몰되지 않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고, 주변 정세를 주도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견 국가의 품격을 세워야 한다.

다변화된 외교의 필요성도 절실하다. 미국 일변도의 외교에서 벗어나 유럽, 동남아시아, 중동 등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다층적 안보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한다. 경제적 상호 의존성의 전략적 활용도 중요하다. 군사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중소국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 중 하나는 경제적 가치를 통해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다.

암울한 전망 속에서도 희망의 단서들은 존재한다. 압도적 열세에도 불구한 우크라이나의 항전 의지는 작은 나라도 강한 의지와 전략이 있으면 거대한 적에 맞설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국제사회의 비판적 여론도 여전히 살아있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주요 언론들이 이번 협상안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것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가치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트럼프의 예측 불가능성은 양날의 검이다. 한편으로는 기존의 경직된 외교 관례를 깨뜨려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 수 있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동맹국들에게는 극도의 불안감을 안겨준다. 우크라이나 협상에서 보여준 것처럼, 사전 협의 없이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그의 스타일은 한미동맹에도 상당한 변수가 될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트럼프의 거래적 사고방식이다. 그에게 동맹은 도덕적 의무나 전략적 필수가 아니라 손익계산의 대상이다. 이는 우리가 미국과의 관계에서 단순히 '우호적 협력'을 기대하기보다는, 명확한 ‘상호 이익’을 제시해야 함을 의미한다.

미국이 주한미군 재편이나 감축을 협상의 지렛대로 한국의 국방비 증액과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국민주권 정부의 단호함과 결기 있는 태도가 필요하다. 세계에서 가장 호화로운 기지에서 장기 주둔을 보장받은 주한미군은 이제 북한으로부터 한국을 방위하는 기능보다 미국 본토의 안보와 같은 미국의 이익을 실현하는 데 더 큰 역할과 기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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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칼럼은 시민언론 민들레에 기 게재된 내용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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