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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사회에 되살아난 19세기식 힘의 질서(2)

김종대 / 국방전문가·전 국회의원
국제법과 다자기구의 권위는 추락하고, 강대국 간의 직접적 협상과 거래가 국제 문제 해결의 주요 수단으로 부상하고 있다. 동맹 체제의 재편도 불가피해 보인다. 미국의 일방적 결정에 반발한 유럽 국가들은 전략적 자율성을 더욱 추구할 것이고, 이는 서방 동맹의 결속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 지역 패권국의 영향력 확대도 주목할 변화다. 러시아, 중국과 같은 지역 강국들이 자신의 세력권 내에서 갖는 발언권이 강화되고 있으며, 이는 중소국들에게는 더욱 제한된 선택권을 의미한다. 우리나라는 이번 사태에서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어야 한다.

먼저 자주국방 능력의 중요성이다. 외부의 안보 보장에만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우크라이나 사태가 보여주고 있다. 강력한 자체 방어력 없이는 종이 위의 어떤 약속도 무의미할 수 있다. 강대국 정치에 함몰되지 않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고, 주변 정세를 주도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견 국가의 품격을 세워야 한다.
다변화된 외교의 필요성도 절실하다. 미국 일변도의 외교에서 벗어나 유럽, 동남아시아, 중동 등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다층적 안보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한다. 경제적 상호 의존성의 전략적 활용도 중요하다. 군사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중소국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 중 하나는 경제적 가치를 통해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다.

암울한 전망 속에서도 희망의 단서들은 존재한다. 압도적 열세에도 불구한 우크라이나의 항전 의지는 작은 나라도 강한 의지와 전략이 있으면 거대한 적에 맞설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국제사회의 비판적 여론도 여전히 살아있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주요 언론들이 이번 협상안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것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가치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트럼프의 예측 불가능성은 양날의 검이다. 한편으로는 기존의 경직된 외교 관례를 깨뜨려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 수 있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동맹국들에게는 극도의 불안감을 안겨준다. 우크라이나 협상에서 보여준 것처럼, 사전 협의 없이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그의 스타일은 한미동맹에도 상당한 변수가 될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트럼프의 거래적 사고방식이다. 그에게 동맹은 도덕적 의무나 전략적 필수가 아니라 손익계산의 대상이다. 이는 우리가 미국과의 관계에서 단순히 '우호적 협력'을 기대하기보다는, 명확한 ‘상호 이익’을 제시해야 함을 의미한다.

미국이 주한미군 재편이나 감축을 협상의 지렛대로 한국의 국방비 증액과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국민주권 정부의 단호함과 결기 있는 태도가 필요하다. 세계에서 가장 호화로운 기지에서 장기 주둔을 보장받은 주한미군은 이제 북한으로부터 한국을 방위하는 기능보다 미국 본토의 안보와 같은 미국의 이익을 실현하는 데 더 큰 역할과 기능이 있다.

만일 중국이나 북한이 미국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발사했을 경우 미국의 정지궤도 위성(DDSP)이 발사 사실을 포착하기는 불확실하며, 미국의 알래스카 지상 기반 레이더가 이를 포착하는 데는 이미 미사일이 하강 단계인 15분 이후다. 그러나 주한미군의 감시체계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 6초면 이를 알 수 있다. 한국은 미군에 정보 기지를 제공하였으며, 그 막대한 운영비도 보조해주고 있다. 이런 한국을 포기하고 더 좋은 주둔 여건이 보장되는 장소가 있다면 얼마든지 빼 가라고 해도 미군은 절대 철수하지 못한다.

경제적으로도 한국의 바이오, 반도체, 자동차, 조선업 등은 미국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제조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 게다가 한국은 관세 협상에서 미국에 3500억 달러를 투자하고도 15%의 관세를 부담하기로 했다. 전 세계에서 미국의 정치적·군사적·경제적 이익이 이처럼 긴밀하게 맞물려 있는 나라는 찾기 어렵다.

국내 보수 언론이 주문하는 대로 이재명 정부가 트럼프 앞에서 위축되어 강한 우리의 본 모습을 잃어 버린다면 스스로 작아져서 무시당할 수 밖에 없다. 이는 대한민국이 우크라이나와 같은 신세로 전락할 수 있는 위험이다. 실제로 1953년에 대한민국은 지금의 우크라이나와 마찬가지의 비참한 신세였다. 그러나 두 번 당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재명 정부는 우리는 쉽게 흔들릴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고, 단호하고 결기 있는 협상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의존적 동맹에서 상호의존적 파트너십으로의 전환이다. 이를 위해 미국에 줄 것은 주되, 전시작전통제권의 한국 전환, 핵연료 재처리 권한 확보와 같은 국가의 핵심 이익과 비전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이는 미국을 배제하자는 것이 아니라, 미국 없이도 최소한의 자기방어가 가능한 역량을 갖추면서 동시에 미국과의 협력을 더욱 전략적으로 활용하자는 의미다.

불확실성 시대에 이재명 정부는 대한민국이 여전히 약소국으로 남아 있느냐, 중견 국가로의 도약이냐를 가늠하는 분기점에 서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가올 한미정상회담과 한일정상회담을 앞두고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외교 전략을 구축해야 한다. 그것은 미국을 맹신하지도, 완전히 등지지도 않으면서, 우리의 길을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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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칼럼은 시민언론 민들레에 기 게재된 내용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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